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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vs 신앙생활 na kim 2015-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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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hodaepa.onmam.com/bbs/bbsView/82/545167

설교 영상은 아래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https://vimeo.com/chodaepa/2015-7-12

 

2015. 7. 12.

 

* : 데살로니가후서 3 6-12 말씀

* : 하나님의 사람들 - 4. 신앙 vs. 신앙생활

 

              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번은 담임선생님께서 독특한 숙제를 내셨습니다.  세계의 속담과 격언을 조사해서 10 이상 찾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이야 인터넷이 있지만 그때는 자료를 찾고 얻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고민을 하던 제게 반짝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제가 성경을 읽다가 궁금한 것을 아버지께 질문한 적이 있었거든요.  저는 ‘잠언’이라는 성경이 어떤 뜻인지 궁금했습니다.  “아버지, 잠언이 뭡니까?  아버지께서 대답하시기를 잠언이란 격언이나 속담과 비슷한 뜻인데, 시대의 지혜로운 말들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 그렇지... 잠언에서 적당한 구절들을 찾으면 되겠네....  저는 성경을 가져와서 숙제에 적당한 구절들을 찾았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비교적 종교적인 교훈들을 찾아서 숙제를 제출했습니다. 

 

              한두 학부모 회의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 학교에 오셨습니다.  선생님과 어머니들이 환담을 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제가 어쩌다가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제가 숙제를 말씀하셨습니다.  제일 독특한 숙제를 녀석이 저라고 했습니다.  누가 목사 아들 아니랄까봐 성경 말씀을 적어왔는데 놀랍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머니께 정말 성경에 이런 말들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성경에는 그저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말들만 있는 알았는데, 이렇게 사람이 살아가는 지혜에 대한 깊은 이야기가 있는지 몰랐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3:14)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니와 사악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하게 하느니라.( 11:3)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17:13)  제가 그때 이런 구절들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비슷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잠언과 전도서에는 이런 말씀들이 많습니다.  성경에 대해 몰랐던 선생님은 마치 비종교적인 것처럼 보이는 지혜의 말씀이 기독교의 핵심인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에 놀랐다면서 거듭거듭 말씀하셨습니다.

 

              , 그렇다면 여러분께 질문이 있습니다.  말씀들은 과연 복음일까요?  예를 들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했을 말씀은 복음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도 복음입니다.  그런데 제가 숙제로 잠언의 말씀들은 어떻습니까?  복음입니까?  

 

              오늘 현대 교회의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범위를 너무 협소하게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의 열매로서의 우리들의 신앙의 범위 또한 축소시키고 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복음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믿음을 전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나아가서 믿는 성도들에게 어떻게 믿음으로 것인지를 가르치는 것도 복음입니다.  복음은 신앙을 가르치고, 신앙으로 사는 생활을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1. 눈물의 요시아왕

 

              저는 요즘 성경이 보여주는 인생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안타깝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들의 오늘을 조명하는데 성경의 인생들은 참으로 유익한 같습니다.  제가 최근에 새롭게 만난 사람 사람은 유다의 대표적인 선왕인 요시아왕입니다.

 

              요시아 왕은 8 어린 나이로 왕이 되었습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그는 믿음과 말씀으로 나라를 다스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성전을 재건했고, 율법을 발견했고, 나라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했습니다.  대하 34:33에서는 요시야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이와 같이 요시야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모든 땅에서 가증한 것들을 제거하여 버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으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였으므로 요시야가 사는 날에 백성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복종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대하 34:33) 

 

         그런데 당시 국제 정세가 복잡했습니다.  앗수르와 신흥 바벨론 제국이 대립하고 있었고, 남쪽의 애굽 또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요시야는 국제 정세를 읽는 시각이 부족했습니다.  애굽의 느고왕이 신흥 바벨론 제국과 전쟁을 하기 위해 유다를 지나가려고 그는 애굽을 가로막았습니다.  느고가 유다와의 불필요한 싸움을 피하려고 했지만 요시아왕은 전쟁을 고집했고,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그는 전쟁터에서 치명상을 입고 예루살렘으로 후송되어 죽었습니다.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는 3개월 동안 왕위를 계승하다가 느고에 의해 폐위됩니다.  그는 애굽에 볼모로 잡혀가고 그의 형제 여호야김이 왕위를 잇지만 이때부터 신흥제국 바벨론에 의해 점점 나라가 기울어갑니다.  유다는 결국 바벨론 제국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지게 됩니다.

 

         결국 유다의 패방은 유다 역사에 가장 선하고 신실했던 요시아의 어리석은 선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왕이었다면 그의 삶을 결과가 아름다워야 할텐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럴까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는 믿음은 우리의 삶의 결과에 아무 영향이 없는 것인가요? 

 

              생각해보면 그에게는 신실한 믿음은 있었지만 차가운 지혜는 없었습니다.  많은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했지만 전쟁만은 자신의 뜻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믿음과 말씀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왕이었던 요시아의 경건한 신앙이 나라 유다의 신앙을 바로 세우는데 크고 중요한 역할을 했었는데, 그의 어리석은 판단이 유다의 패망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아와 모든 유다 백성이 슬퍼하며 애가를 불렀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죽음이며 어리석은 죽음입니다.  그에게 선한 것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믿음, 백성들의 존경, 선지자 예레미아의 사랑.... 그러나 그의 인생을 결정짓고, 그의 정치를 결정지은 것은 모든 선한 것이 아닌 그의 지혜롭지 못한 판단이었습니다. 

 

2.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산다는

 

         때로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착한 사람이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의 모든 판단과 결정 또한 선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므로 그의 모든 행위가 선하거나 옳은 것이라고 전제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특히 다른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중요한 책임을 맡은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한국 교회가 가졌던 ‘예수 믿는 대통령’ 혹은 ‘장로 대통령’에 대한 환상이 한국 역사에 얼마나 상처를 남겼는지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수많은 문제들 속에 있지만 문제를 극복하거나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문제 속에 있지만 문제를 인정하고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교회이며, 나는 목회자이고, 기도하면서 결정했고, 말씀에 근거해서 선택했으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본 전제가 잘못되었습니다.  내게 신앙이 있다는 것과 내가 지혜로운 판단과 선택을 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요시아 또한 기도하면서 국가를 이끌었을 것이고, 애굽과의 전쟁의 승리를 위해 기도하며 예배했을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해서 정의롭고 바르게 판단하고 지혜로운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과 뜻에 자신을 맡기고 말씀의 인도하심을 받는 일에 조금 노력하고 조금 고민해야겠습니다.  잠시라도 하나님을 뜻을 묵상하는 일에 나태해질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지나치게 믿게 되고, 교만하고 어리석은 판단을 하게 됩니다.  사탄은 때를 놓치지 않는 같습니다.  성도의 판단과 삶을 이용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기도 하는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가까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참된 지혜는 하나님의 생각에 순종하는 나의 삶에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성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참된 지혜로 있기를 소망합니다.  더욱 가까운 인도하심을 소망합니다.   

 

3. 믿음과 규모 있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중요한 개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과 규모 있는 삶’에 대한 것입니다.  삶이 규모가 있다...?  무슨 말일까요?  본문을 봅시다.

 

6.형제들아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7.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8.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9.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10.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11.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12.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써야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잘못된 종말론으로 인해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것이고, 세상은 종말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에 지금 세상에서의 삶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주님을 기다린다는 핑계로 무위도식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처럼 주님만을 기다리는 삶이 아닌 노동하고 생산하는 성도들을 정죄하고 판단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신앙이 좋은 것처럼 소리 높여 기도하고 찬양했겠지만 정작 삶에서는 아무런 소득도 없고 피해만 끼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가지를 가르치십니다.  하나는 잘못된 종말론을 바로잡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잘못된 삶을 바로 잡는 것입니다.  잘못된 종말론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요?  살전 5:1-2, 5:16-18 말씀이 핵심입니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그리고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들어온 잘못된 삶을 바로 잡습니다.   살전 5:14에서 그는 ‘규모 없는 사람들’에 대해 언급합니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구절에서 ‘규모 없는 사람’ 마음이 약한 사람’ ‘힘이 없는 사람’은 서로 통합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 있는 사람일까요?  아예 믿음이 없는 사람들일까요?  당연히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믿음으로 성도되고 교회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때로 규모 없이, 때로 연약하게, 때로 힘도 능력도 없이 살기도 합니다.  교회와 성도는 그런 성도들에 대해 오래 참고 권면하고 세워서 하나님의 좋은 일꾼으로 성장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후서에서는 그런 상황이 심각해졌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처음 편지를 보내고 답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답을 들어보니 변화된 것이 별로 없습니다.  특히 그들 중에서 규모 없이 행함으로 믿음을 강조하지만 일하지 않는 사람들에 주목했습니다.  그들은 그저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성실한 삶을 비난하고 방해했습니다.  자신들의 신앙만 주장했습니다.  다른 성도들에게 피해를 입힙니다.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권면합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살후 3:6)  물론 당장 그들을 교회 공동체에서 내쫓거나 결별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단호한 입장을 가지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한번 대답하시겠습니까?  이들에게 믿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당연히 이들에게 믿음이 있습니다.  어쩌면 뜨겁고 헌신적일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교회에 권면하시기를 심지어 그들을 떠나라고 말씀하실까요?  그것은 바로 그들에게 믿음은 있으되 믿음으로 사는 삶은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있으되 믿음이 주는 지혜와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선물로 받았으되 신앙으로 사는 삶이 없습니다.  자기 뜻대로 허락된 믿음을 해석하고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4. “본받게 하려 함이라!

 

               성도 여러분!  저의 초등학교 4학년 선생님의 질문에 이제 대답하실 있겠습니까?  복음은 예수를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만이 복음은 아닙니다.  복음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예수를 가르칩니다.  믿는 성도들에게는 인생의 가치와 지혜를 가르칩니다. 세상적으로 그것이 손해일 있고 아픔일 있어도 성도와 교회가 십자기의 길을 담대하게 걸어갈 있는 것은 우리에게 복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삶의 지혜와 용기를 주는 것이며, 우리를 성장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시아의 비극적인 삶이 이해되십니까?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규모없는 삶이 이해되십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믿음이 있다는 것으로 만족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믿는 자들에게 삶의 지혜와 가치를 가르치는데, 믿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삶에 문제가 발생하고 고통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성도 여러분!  교회와 성도와 믿음으로 충만한 한국 사회에 이렇게 교회와 성도로 인한 잡음이 많은지 이해되십니까?  성도와 교회로서의 우리의 삶에 아픔과 고통이 계속되고 있는지 이해되십니까?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는 사실에만 집중하지 마시고,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 있지 못함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중심이 되고 가치가 되고 생활이 되어서 신앙이 아닌 신앙으로 하는 생활,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건강한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9절에서 자신이 선교한 교회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지 않고 자비량으로 선교를 했던 이유를 밝힙니다.  그것은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살후 3:9)  그리고 이것은 그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이유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 믿음이 중심이 되고 가치가 되고 뿌리가 되어서 만드는 삶의 열매에 관한 본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우리 초대교회는 사도 바울의 권면과도 같이 서로에 대해 믿음과 믿음으로 사는 삶의 본을 보이는 복된 교회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서로의 삶에서 믿음으로 사는 삶의 지혜와 용기를 얻을 있기를 소망합니다.  서로에 대해 하나님의 편지가 되는 거룩하고 복된 삶을 사는 성도가 되고 교회가 될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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