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연 vs 조연 | na kim | 2015-08-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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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상은 아래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https://vimeo.com/chodaepa/7-19-15
2015-7-19 필라델피아 초대교회 주일예배 제목 : 하나님의 사람들 -5.주연 vs 조연
2015. 7. 19. * 본 문 : 역대상 11장 15-21절 말씀 * 제 목 : 하나님의 사람들 - 5. 주연 vs. 조연 가끔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안타깝게 생각되는 배우들이 있습니다. ‘주연인 듯 주연 아닌 주연 같은 너~~’ 뭐 이런 느낌입니다. 조금만 더 잘하면 될 것 같고, 조금만 역할이 늘어나면 주연급이 될 텐데 왜 저 사람은 항상 어정쩡한 조연만 할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성경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이 소개하는 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주인공의 역할이 아닌 조연으로 등장하는 사람들,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요? 예를 들면 바나바가 있습니다. 그는 바울보다 먼저 지도자로 교회를 섬겼지만 결국 리더십을 바울에게 넘겨줍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바울을 원망하거나 불평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서상 ‘머리가 될 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바나바가 조금 더 사역에 대한 욕심을 냈더라면...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다윗의 가장 좋은 친구였던 요나단도 그렇습니다. 아버지 사울왕 조차 요나단이 권력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책망합니다. 왜 아버지가 왕인 이 나라의 주인공이 되려고 하지 않고 다윗을 주인으로 세우려 하느냐고 호통을 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다윗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고, 그는 그렇게 아버지와 함께 전쟁터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모세의 형이었던 아론은 어떻습니까? 야곱의 형이었던 에서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성경에는 안타깝게도 주인공의 역할보다는 주인공을 빛나게 하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성경의 인물로 등장한다면 어떤 역할을 하고 싶으십니까? 주인공입니까? 조연입니까? 그 중에 저는 오늘 여러분이 잘 알지 못하는 한 사람에 대해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아비새’입니다. 아비새는 ‘나의 아버지는 선물이다, 나의 아버지는 이새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다윗의 조카이자 요압 대장군의 동생이기도 합니다. 다윗이 종종 그들을 부를 때 ‘스루야의 아들들’이라고 부르는데, 스루야는 다윗의 누이입니다. 아비새는 다윗의 핵심적인 30인의 용사 중 한 사람이었고, 수많은 공적을 세웁니다. 그런데 다윗에게는 3인의 가장 뛰어난 용사가 있었습니다. 대장군 요압과 야소브암, 엘르아살이 그들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21절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아비새는 첫째 3인에게는 미치지 못하는, 둘째 3인 중에 가장 뛰어난 용사였습니다. 성경이 소개하는 아비새는 그런 사람입니다. 왕도 아니었고, 첫째 용사도 아니었고, 성경이 주목하는 믿음의 사람도 아니었고, 어떻게 태어나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었는지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시대의 주인공이었던 다윗이 가는 곳 어디나 함께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에 대해 생각하려 합니다.
1. 아비새의 등장 여러분이 그동안 신앙생활을 하시는 중에 아비새에 대한 말씀을 들어본 적이 있다면 대상 11장 15-19절의 이야기일 것입니다. 다윗이 아직 왕권이 강하지 않았을 때 블레셋과 전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블레셋 군대가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 본진을 두고, 진전기지를 가까운 르바임 골짜기에 세웁니다. 자신의 고향인 베들레렘, 자신이 어릴 적 뛰어놀고 자랐던 곳을 바라보던 다윗이 갑자기 부하들에게 하소연을 합니다. “저기 멀리 보이는 베들레헴은 나의 고향인데, 이제 블레셋 군대가 진을 치고 있구나. 갑자기 목이 마르다. 저 성문 곁에는 내가 어릴 적부터 마시던 우물물이 있는데 누가 가서 내가 그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할꼬!” 바로 그 때 아비새를 비롯한 3인의 용사가 목숨을 걸고 블레셋 진영으로 달려갑니다. 우물물을 길어와서 다윗에게 바칩니다. 비로소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인지를 깨달은 다윗이 대상 11장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를 어찌 마시리이까!”(대상 11:19) 그는 그 말을 마시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저 역시 이 부분에 대한 말씀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아비새처럼.... 적진을 향해 돌진할까요? 왕에게 목숨바쳐 충성할까요? 이야기는 대단히 재미있는데 적용하기는 참 애매하고 힘들다는 생각을 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최근에 성경을 인물들에 맞춰서 읽으면서 아비새에 대해 흥미를 느꼈습니다.
아비새는 삼상 22장 1-2절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보실까요?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삼상 22:1-2) 다윗이 망명생활을 할 때 그의 모든 가족과 친척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또 당시 사회부적응자들이나 정치범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아비새는 이렇게 등장부터 개인의 이름이 아닌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으로 소개됩니다. 어쩌면 그의 등장은 그의 삶을 잘 설명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늘 그렇습니다. 누구와 함께... 누구를 위해서 등장합니다. 2. 용사 아비새 그렇다면 아비새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사실 그는 다윗의 가장 충성되고 용맹한 용사였습니다. 그런데 늘 그 결과가 좀 애매합니다. 아비새가 이름과 함께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상 26장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추격하는 사울왕을 엔게디 동굴에서 한번 살려줍니다. 그리고 그는 십 황무지에서 다시 두 번째 기회를 맞이합니다. 이때 다윗은 많은 용사 중 특별히 신임하던 아히멜렉과 아비새 단 두 사람에게 “누가 나로 더불어 사울에게 이르겠느냐”고 묻습니다. 아비새는 주저 없이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하고 용감히 나섰습니다. 당시 사울왕에게는 3000명의 군대가 함께 있었습니다. 밤에 몰래 적진으로 숨어든 다윗과 아비새는 자고 있는 사울의 진영을 파고듭니다. 아비새는 곤히 잠든 사울왕에게 창을 겨눕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며 사울을 찔러 죽이려 합니다. 이때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기고 사울의 창과 물병만 가지고 나옵니다. 여러분! 누가 멋있게 묘사됩니까? 같이 죽음을 넘어 적진을 헤치고 다녔는데, 다윗만 멋있습니다. (다윗>아비새) 또한 아비새는 전쟁이 있을 때마다 큰 공을 세웁니다. 삼하 10장에서 암몬과 아람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침략합니다. 이 전투에서 형제인 아비새와 요압은 각각 군대를 나누어, 형 요압은 아람 군대를, 아우 아비새는 암몬 자손을 책임집니다. 형제는 그야말로 용감하여 큰 승리를 거둡니다. (삼하10:6-14). 전공은 모두 형님인 요압에게 돌아갑니다.(요압>아비새) 그 뿐입니다. 아비새는 참으로 많은 공을 세웁니다. 압살롬의 반란군과 싸울 때, 벤냐민 지파의 세바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다윗이 에돔을 정벌할 때 그는 늘 가장 앞서서 목숨 걸고 싸웁니다. 아비새의 전투 장면 가운데 가장 극적인 장면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다윗을 구하는 장면입니다. 당시 골리앗과 같은 거인족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비브놉이라는 블레셋의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는 300세겔 무게의 창을 다루는 용사였고, 다윗이 피곤하여 지친 틈을 타서 죽이려 하였습니다. 이때 그를 죽이고 다윗을 구한 것이 바로 아비새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충성되고 성실한 아비새에 대한 다윗의 사랑이 부족합니다. 잘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경계하고 비난합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도망가던 길이었습니다. 사울왕이 속했던 베냐민 지파의 시므이가 다윗에게 돌을 던지며 저주합니다. 주변에서 아무도 다윗을 보호하거나 나서서 말리지 않았을 때 아비새가 나서서 시므이를 죽이겠다고 청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삼하 16:10上) 다윗이 반란군을 제압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그 시므이가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자 왕 앞에 엎드려 잘못을 빌었습니다. 역시 이때에도 아비새는 “시므이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죽어야 마땅치 아니하니이까”(삼하19:15-21) 라고 왕에게 충언합니다. 다윗이 다시 말합니다. “다윗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너희가 오늘 나의 원수가 되느냐!”(삼하 19:22上) 왜 다윗은 자신에게 이렇게 충성된 신하였던 아비새를 이렇게 경계하고 원수라고까지 말하는 것일까요? 이런 박대를 받으면서 왜 아비새는 다윗에게 충성했을까요? (다윗의 박대>아비새의 충성) 3. 조연으로 사는 사람들 자,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볼까요? 여러분은 주인공이 되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조연이 좋습니까? 뛰어난 능력을 가졌던 아비새는 왜 이렇게 늘 조연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역할로만 등장할까요? 성도 여러분! 그런데 말입니다.... 실은 우리 인생에 조연이 있을까요? 좀 재미없는 인생이 있을 수 있고, 좀 성공하지 못한 드라마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은 모든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그 사람 자신입니다. 우리들 인생에 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가치 있는 인생이요, 중요한 인생입니다. 값없이 살아야 할 인생은 없습니다. 조연만으로 살아야 할 인생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인생에 대해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고 주인공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각자의 삶의 주인공으로 만드시기 위해 비전을 주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때로 자기 인생인데... 자신이 살아야 할 삶인데, 자신의 삶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조연처럼, 혹은 엑스트라처럼 여기고 살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셉의 형님들입니다. 그들은 아버지 야곱에게서 받은 상처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요셉에게서 느낀 분노와 질투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상처가 인도하는대로 삽니다. 악을 행했고, 평생 그 짐을 짊어지고 삽니다. 다른 사람의 영향이 자신의 삶을 인도하도록 삶을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다른 사람이 주인공이 되도록 허락해버린 것입니다. 아비새의 형님 요압도 그렇습니다. 요압은 아비새에 비해 큰 영광을 누렸고 많은 권력을 가졌습니다. 적어도 성경에 훨씬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안에 찾아온 권력욕에 자신의 삶을 내어줍니다. 요압이 스스로의 삶에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것은, 그의 삶의 대본을 쓰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그 자신의 욕심을 따라 주인공으로서의 대본대로 산 것이 아니라 조연으로 욕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자신의 인생의 주인공의 자리를 뺏겨버린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울왕입니다. 다윗과 그의 만남은 그의 인생을 빛나게 하는 중요한 기회일 수 있고, 또 그의 인생의 위기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다윗과의 만남이 그의 인생의 기회가 되려면 사울왕 자신이 자신의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다윗은 사울의 인생을 빛나게 하는 좋은 조연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물론 다윗의 삶에는 다윗이 주인공이지만 말입니다. 적어도 사울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허락하신 영광이니까요. 그런데 사울은 다윗과의 만남을 위기로 생각합니다. 바로 그때부터 사울의 인생은 조연의 인생으로 변합니다. 다윗이 그의 삶이 주인공으로 들어옵니다. 다윗에 의해 사울의 인생이 결정됩니다. 여러분은 주연으로 사십니까? 조연으로 사십니까? 여러분의 인생에 여러분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하나님의 뜻대로, 주신 영광대로 살아갑니까? 다른 사람, 다른 가치, 다른 역할에 끌려가는 인생을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중요한 조연조차 포기하고 그저 우리 인생의 드라마가 흘러가는 대로 맡기고 계십니까? 4. 아비새, 자기 인생의 주인공 오늘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만난 아비새는 조연처럼 기록되었지만 사실은 철저하게 자신의 인생에 주인공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시대에 대한 성경의 기록이 다윗 중심으로 되지 않고 아비새를 중심으로 기록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윗 왕조를 중심으로 기록한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역대상하에 다윗이 주인공으로, 다른 모든 사람은 조연처럼 기록된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만일 아비새의 삶을 중심으로 하는 기록이 있다면 그 기록의 주인공은 당연히 아비새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 인생의 주인공의 자리를 빼앗긴 적이 없습니다. 물론 그는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때로 실수하고 격동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일관되고 충성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계획하시고 그에게 맡긴 역할을 잘 수행합니다. 그의 인생이라는 드라마에 그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맡기신 사명과 뜻에 충성합니다. 때로 그가 하는 역할에 장애가 생깁니다. 분노가 가로막기도 합니다. 사람이 가로막기도 합니다. 슬픔에 사로잡힙니다. 충성을 다 바쳤더니 다윗은 오히려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을 거듭 거절하고 모욕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평가와 판단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자기 인생의 주인공의 역할을 맡기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왕 다윗도 아니요, 형님 요압도 아닙니다. 그는 오직 자기 인생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초점을 맞춥니다.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로 말미암아 사는 삶을 거절합니다.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사람의 평가와 판단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받은 사명과 뜻에 순종합니다. 그는 평생을 다윗에 충성하는 용사로 살았고, 역사에서 조용히 사라집니다. 아비새에 대한 성경의 마지막 기록은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이 기록은 시대적으로는 다윗 시대초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삶을 정리하면서 그의 삶과 관계된 사람들을 서술하면서 아비새를 그렇게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는 충성되고 용맹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명에 목숨 바쳐 충성한 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우리들의 삶에 주인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각자의 삶의 주인공의 역할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 욕심에, 감정에, 두려움과 염려에 흔들립니다.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거룩한 주인공의 자리를 나도 모르게 빼앗깁니다. 돈을 많이 벌어야 주인공이 아닙니다. 사울처럼 왕이 된다고 주인공이 아닙니다. 큰 소리치고,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성공하고, 밟고 올라서고... 그런 사람들이 자기 인생에 주인이 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죄와 악에 그들의 인생의 중심을 빼앗겨 버린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사명과 뜻대로 살아야 주인공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인생, 가치 있고 보람되게 살아야 주인공입니다.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은 성도요 교회인데, 우리의 삶과 신앙에 십자가의 흔적이 나타나야 주인공입니다. 은혜로 부르심을 받았는데, 내 삶에 은혜가 드러나고 긍휼함이 드러나야 주인공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 각자의 인생이라는 드라마, 주연이십니까? 조연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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