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8.
* 본 문 : 눅 15:11-24
* 제 목 : 기억과 함께 울다. - 8. Beauty Inside(1)
오늘도 영화 이야기로 시작해 볼까요? Beauty Inside(사진1)라는 영화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두 달 전에 보고 바로 칼럼을 썼다가 신문사로 보내지 못했습니다. 무엇인가 제가 마음에 느낀 것과 글로 표현한 것이 맞지 않아서입니다. 이번 주에 문득 아... 그렇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 여러분께 소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우진은 18살이 되던 생일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봅니다. 너무 놀랍니다. 30대 후반의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우진의 아버지도 그랬습니다. 18세가 지나면서 잠을 자고 나면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진이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전혀 다른 얼굴의 사람... 때로는 여자가 되기도 하고, 할아버지가 되기도 하고, 일본 사람이 되기도 하고, 미국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상백이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유일하게 우진의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수제 가구 회사를 설립하고 우진은 가구를 만들고 상백은 판매합니다. 우진의 가구를 좋아하는 한 가구 판매회사에서 일하는 ‘이수’라는 여성이 있습니다. 우진은 이수를 보고 한 눈에 반하게 됩니다. 어느 날 아침 잘생긴 남자로 잠을 깬 우진은 이수에게 접근해서 데이트에 성공합니다. 이수도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습니다. 자, 이제 어떻게 할까요? 우진은 잠들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잠을 자지 않고 이수와 데이트를 합니다. 3일째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우진은 지하철을 탔습니다. 자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지만.... 누군가 깨워서 일어나보니.... 우진은 40대 초반의 얼굴로 변해 있었습니다. ‘김상호’라는 배우가 그 역할을 합니다. 이후에 이수 주변 날마다 다른 얼굴로 맴돌던 우진은 결심합니다. 자신을 밝힙니다. 처음에는 그런 우진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이수... 우진의 진심을 알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됩니다. 어느 날은 여자가 되고, 어느 날은 노인이 되고, 또 어느 날은 어린 아이로 자신 앞에 나타나는 우진을 이수는 사랑하는 사람으로 받습니다. 아무리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도 그 속에서 ‘우진’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시련이 찾아옵니다. 우진은 이수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청혼을 합니다. 이수는 그 청혼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우진은 비로소 이수와 자신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음을 깨닫고 이별을 결심합니다. 이수 또한 우진의 이별 통고를 완강하게 거부하지 못합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이별하고 맙니다.
우진은 먼 나라 체코로 가서 계속 가구를 만듭니다. 그 가구들은 다른 상표로 이수의 가구 매장에서 판매되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우진이 만드는 수제 가구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진은 기계로 똑 같이 생산해내는 가구가 아닌, 비슷해 보이지만 모두 다른 가구들을 직접 자신의 손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이수는 먼 나라 체코에서 배송되는 그 가구들에서 우진을 느낍니다. 가구들은 모두 다르지만 같은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다른 모양을 한 다른 가구들에서 보이지 않는 사랑하는 사람의 흔적을 찾아서 이수는 체코로 날아갑니다. 체코의 한 강변에서 사랑하는 연인은 손을 잡습니다. 이수가 우진에게 말합니다.
“나는 니가 어떤 모습이어도 상관없어. 매일 다른 모습이어도 괜찮아. 다 같은 너니까... 나는 니 안에 김우진을 사랑하는 거니까...”
1. 자신에 절망하다.
지난 주에 저는 자신에 대해 좀 실망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목사님들이 모이는 회의에 참석했는데, 저의 부족한 성품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좀 더 참았어야 했는데, 또 그 목사님은 항상 그런 식으로 말씀하는 줄을 알고 있었는데... 제가 참지를 못했습니다. 앞에 나가서 마이크를 잡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말하고 말았습니다. 제 말이 옳은 것은 아마도 모두가 알 겁니다. 문제는 제가 제 성격을 함께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옳은 것을 말하되 저의 성품을 드러내면 안되는 것인데.... 한 목사님의 공격적인 언행에 잠시 마음의 질서를 잃었습니다. 선배 목사님들, 어르신들이 많이 계신데, 불편하게 해드려서 죄송하다고 곧 사과를 하기는 했지만... 가끔 저는 저의 성품 때문에 불편해질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신에 대해 늘 만족하십니까? 자신의 마음의 상태, 선택, 정서와 감정들에 늘 만족하고 자부심이 있으십니까? 혹시 가끔씩 나는 왜 그런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고 말았을까? 후회하시는 일은 없습니까? 혹시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싫을 때는 없습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은 우리만 그런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서 ‘오호라... 오호라....’ 라고 탄식했었고, 사도 베드로도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마음껏 기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삶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갈릴리로 낙향하는 것은 죄책감과 수치심의 결과입니다. 다윗도 자신의 죄가 항상 자기 앞에 있다고 고백하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은 하나님 앞에 더욱 엎드려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우리의 자신에 대한 절망은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둘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추하고 더러운 삶의 모습은 하나님의 은혜로 씻고 사랑으로 옷 입어야 할 이유입니다.
2. 무너진 형상으로 살다.
오늘 본문에서 만나는 탕자의 모습은 참으로 비참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아들이었지만 ‘탕자’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결국 돼지와 함께 삽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아들이 돼지와 살면서 돼지가 먹는 것을 함께 먹게 되었다고 설명하시는 것은 상징성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그것은 레위기 11장 7절에서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금하신 이유가 가장 큽니다.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레 11:7) 왜 금하셨는지는 건강이나 위생 등의 다양한 근거들이 있겠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적으로 금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헬라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정말 맛있는 음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이미 유대땅에는 돼지를 사육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여러분! 유대인이면서 돼지를 키우는 사람들...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그들은 식민의 시대에 먹고 살기 위해서 배교하든지, 혹은 배교를 선언하지 않아도 이미 배교적인 삶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면서 갈릴리 호수 동편에 있는 거라사 지방에서 귀신을 쫓아내셨을 때 그 귀신들이 돼지에게로 들어갔고, 돼지들이 물에 빠져서 몰사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러분! 왜 하필이면 귀신은 돼지를 선택했고, 깡그리 물에 빠져 죽었고, 성경은 이것을 기록했을까요? 귀신, 돼지, 이방의 문화와 삶, 유대인의 정결의식 등과 관련해서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누가복음 15장에서의 비유와 8장에서의 사건을 ‘돼지’를 중심으로 연결해서 생각해보십시오. 탕자는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그곳에는 돼지를 사육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탕자는 그들과 함께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탕자가 아버지의 유산을 다 사용했을 때 허랑방탕한 삶이 끝나고 경건하고 검소한 삶이 시작되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이제 본격적으로 돼지와 함께 삽니다. 아버지를 떠난 아들이 만난 세상의 문화는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돼지를 즐기는 화려한 삶, 다른 하나는 돼지와 함께 하는 비참한 삶입니다. 이 두 가지 삶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입니다. 잔치에서 돼지를 즐기든지, 함께 돼지가 되어 잔치의 즐거움이 되든지... 아버지를 떠난 세상에서 아들이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결국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삶은 없습니다. 아버지의 형상이 깨지고 무너지고 뺏겼습니다. 무엇을 상징합니까? 예,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이 한 대 그 영광을 즐겼던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처절하게 무너져서 식민지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결국의 같은 돼지입니다. 우리들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습니다. 비참한 모습으로 살고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세상과 적당하게 타협하면서 아들의 영광과 존엄을 빼앗기고 잃고 무너진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3. 자유와 영광을 선택하다.
예수님은 공생애의 대부분을 갈릴리 근방에서 보내셨습니다. 지도를 보시지요.(지도1) 익숙한 이름들이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가 있고, 가버나움, 벳세다, 거라사, 티베랴, 고라신 등이 주변 도시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탕자 비유를 주실 때에도 예수님은 갈릴리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주실 때....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나가서 허랑방탕했던 곳이 돼지를 키우는 지역이라고 했을 때... 아마도 사람들은 어... 우리 동네? 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가까운 어느 마을일 것입니다. 최소한 거라사 지역을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미 그들 가까이 이방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함께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가 탕자일까요? 그들 자신일 수 있습니다. 누가 돌아와야 합니까? 지금 비유를 듣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돼지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로마와 함께 권력을 누리며 잔치의 삶을 살든지, 로마에 굴종하여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스스로를 택함 받은 민족이라고 자부하면서도 이방의 문화와 우상을 받아들이고 숭배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돌아와야 합니다. 바로 그들이 탕자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모습의 비참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이 말씀을 주시기 얼마 전에 있었던 사건을 그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군대 귀신이 들렸던 한 사람을 예수님이 고치셨습니다. 그 더럽고 무서운 군대 귀신, 그들이 키우고 있던 돼지와 함께 갈릴리 호수로 뛰어들었습니다. 무서운 귀신으로부터의 자유, 더러운 돼지로부터 자유 - 이것이 누가복음 8장과 15장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내용입니다.
주목하실 것은 귀신 들린 사람과 탕자가 깨끗하고 온전한 모습이 되어 예수님과 아버지를 만나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장 더럽고 비참한 모습으로 예수님을, 아버지를 만납니다. 그들이 더러울수록, 비참할수록 더욱 간절하게, 절박하게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더럽고 추하기 때문에 좀 깨끗해지고 난 다음 아버지를 만나야겠다...가 아닙니다. 귀신을 좀 정리하고 난 다음 예수님을 만나면 나를 인정해주시겠지... 가 아닙니다. 그들의 오늘의 모습, 현재의 모습, 이제까지 살아왔던 그 어떤 모습이어도 좋습니다. 그들은 아버지를 만나야 합니다. 아버지께 자유가 있고, 영광이 있습니다.
4. 내 모습 이대로!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 앞에 목회자로 서 있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의 오늘을 보아도, 살아온 과거를 보아도... 저는 압니다. 참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저의 부끄러운 모습을 지적하고 저에게 “You, out!"을 선언하시면 저는 그럴 수밖에 없는 못난 사람입니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주의 종으로서의 목회자의 얼굴만이 아닌 다른 여러 가지 얼굴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탕자가 되기도 하고 귀신들린 모습이 있기도 하고 돼지와 구별되지 않는 모습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매주일 이렇게 말씀을 전해야 하고, 매일 여러분들을 만나면서 맡기신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어떻게 그 사명을, 사역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부끄러운데, 이렇게 수치스러운데 말입니다.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탕자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아버지에 대한 마음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하겠다는 마음입니다. 아버지는 그 마음으로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 뛰어가서 맞이합니다. 현재의 어떤 모습에 대해 꾸짖거나 거부하지 않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아버지는 아들을 맞이합니다. 예수님 앞에 서 있던 귀신들린 사람, ‘군대’라는 이름을 가진 강력하고 많은 귀신이 들린 사람도 그의 삶의 조건과 상황에 관계없이 주님 앞에 섰습니다. 주님은 그를 고치시고 영접하셨습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계속 찬송가 214장을 흥얼거렸습니다. 우리가 이 찬송을 진심으로 부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먼저 가사를 읽어드리겠습니다.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그 구원 허락하시사 날 받으옵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허락하신 주 날 받으옵소서
큰 죄에 빠져 넘칠 때 날 위해 피 흘렸으니
주 형상대로 빚으사 날 받으옵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내 주님 서신 발앞에 나 꿇어엎드렸으니
그 크신 역사 이루게 날 받으옵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허락하신 주 날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하나님을 믿는 나는, 마치 믿음 없는 사람처럼 살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그 나라의 백성이라 말하지만 또 다른 수천 수만의 얼굴로 살고 있습니다. 그 중 어느 하나의 얼굴로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의 그 얼굴을 보지 않으십니다. 왜 그 얼굴로 살았냐고, 추하고 더럽다고 책망하고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우리 안에 두신 하나님의 형상과 사랑으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우리의 소망은 나의 능력과 자격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참되고 영원한 소망,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함께 토론할 질문
1. 누가복음 8:26-39의 말씀과 눅 15:11-4의 말씀을 읽읍시다. 이 두 말씀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각자의 입장에서 말해 봅시다.
2. 자신에게 실망해 본 일이 있습니까? 다른 성도 혹은 직분자에게 실망해 본 일이 있습니까? 어떤 모습에서 우리는 서로에 대해, 자신에 대해 실망하게 됩니까?
3.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입장에 서 봅시다. 세상에서 돌아오는 아들을 맞이할 때 아버지에게 있어서 가자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아들은 어떤 자격과 요건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까?
4. 하나님이 우리를 거절하지 않으시고 맞아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어떤 자격과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까?
함께 드릴 기도
1. 나의 모든 연약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 백성으로 삼아주시는 하나님께 먼저 감사를 드립시다. 나 자신에 대한 죄책감과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을 정죄하지 않도록 도우시며 하나님이 우리를 용납하심같이 나 자신과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인도하소서!
2. 찬송가 214장을 함께 부르고, 이 찬송을 기억하며 각자의 기도 제목으로 기도합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