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예배

  • 홈 >
  • 예배와 말씀 >
  • 주일 예배
주일 예배
기억해야 하는 이유 na kim 2015-11-12
  • 추천 0
  • 댓글 0
  • 조회 352

http://chodaepa.onmam.com/bbs/bbsView/82/545193

 

2015. 11. 1.

 

* : 고린도후서 4 10

* : 기억과 함께 울다. - 7. 기억해야 하는 이유

  

              얼마 전에 재미있는 영화 편이 개봉되었습니다.  내용인즉슨, 승승장구하던 뉴욕의 백만장자가 암에 걸립니다.  의사는 6개월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점점 건강을 잃어가고 절망에 빠져 있을 누군가 그에게 다가옵니다.  거절할 없는 유혹을 합니다.  인공적으로 배양된 젊고 건강한 육체에 그의 기억을 심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합니다.  의식이 없는 고깃덩이에 불과한 싱싱한 육체에 백만장자의 기억이 기계장치에 의해 심겨집니다.  그리고 그는 청년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훌륭한 외모와 건강을 얻었습니다.  이제 그는 즐겁게 사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기억을 옮긴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먹어야 하는 약을 깜빡 먹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꿈을 꿉니다.  자신을 남편이라 부르고, 아빠라 부르는 여자 아이를 보게 됩니다.  꿈이 너무 생생하고 괴로워서 자신을 시술한 의사를 찾아갔지만 만족한 대답을 얻지 못합니다.  결국 그는 약을 먹지 않을 때마다 반복해서 특이한 기억에 시달리게 되고, 기억 속에 있던 곳으로 찾아가서 가정을 만납니다.  그들은 그를 이미 죽은 남편, 아버지로 알고 있었습니다.  영화는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저는 영화가 만드는 이야기의 결론에는 사실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영화의 발상이 재미있고도 무섭습니다.  영화는 ‘탈피신경학’이라는, 현대 과학이 이미 연구하고 있는 분야를 배경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과학의 분야로서의 ‘탈피신경학’은 거리가 멀고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것에 상상력을 더해서 영화로 만들었더니...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다가왔습니다.  다른 사람의 몸에 기억을 이식해서 계속 ‘나’ 자신으로 살아갈 있다는 것은 인류가 오랫동안 꿈꿔온 ‘영원불멸’에 대한 욕구의 다른 표현이면서, () 정해놓은 생명의 경계를 넘나드는 욕망입니다.  영화가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생명은 무엇이고,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뇌의 기억이 'Self'(自我) 전부일까요?  만일 기억하지 못하는 육체를 가진 사람은 존재하지 않거나 의미 없는 생명일까요?  다른 몸에 기억이 이식되면 그가 나일까요?  내가 그일까요?  도대체 사람은 어디까지 상상력을 발휘할 것이며, 과학은 어디까지를 지원할 있을까요?  저는 과학과 상상력이 만나는 지점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숨결을 느낍니다.  

 

1. 기억하라!

 

              혹시 여러분은 인생의 부분에 정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지는 않습니까?  생각만 해도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순간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무의식 속에 각인되어 있는 부정할 없는 기억들이 있습니다.  잊고 아프고 자유롭고 싶은데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이런 식입니다.  그런 각인된 기억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때마다... ... 사람은 의식적으로 기억을 조작할 수는 없는가보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때로 성경은 우리들에게 잊었으면 하는 기억들을 오히려 기억하라고 명령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자유의 땅을 찾아서 광야로 들어섰을 하나님은 그들에게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노예였던 것을 기억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실을 기억하고 싶었을까요?  후손들에게 가르치고 싶었을까요?  사사기의 시대의 기록을 보면 이스라엘은 참으로 비참합니다.  왕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과 법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욕심과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다가 이스라엘 지파들끼리 전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이방 사람들보다 악하고 추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을 기록합니다.  사울의 어리석은 신앙, 다윗의 연약했던 모습, 이스라엘 열왕들의 타락하고 부패했던 모든 기록들이 가감없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아브라함과 이삭의 연약함도, 야곱과 요셉의 어려웠던 순간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장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치는 장면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은 하나님의 기억입니다.  성경은 모든 것을 기록하고 하나님은 그것들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그것들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실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모습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억의 목적 - 바울의 기억을 통해서 함께 찾아보실까요?

 

2. 예수를 죽인 - 스데반에 대한 기억

 

              전에 말씀을 나누면서 사도 바울의 자신에 대한 표현들을 묵상했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그는 선교 초기 자신을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고백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그는 ‘성도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시원하지 않았던 같습니다.  달려갈 길을 가고, 삶을 마치기 전에 그는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있었던 고백 하나를 내려놓습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라는 고백입니다.  그가 자신을 그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고백했을까요?  정말 바울은 자신을 못나고 부족해서 아무 것도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사도 바울이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했던 이유는 자신의 과거의 행적과 관련이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사도로, 장로로 섬기고 있고 받은 사명과 사역에 있어서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고 있지만... 그는 아마도 잊을 없는 이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 각인된 사람, 바로 스데반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예수를 죽인 것’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아마도 편지를 읽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다른 성도들은 말씀이 가슴에 닿지 않을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릅니다.  그는 예수의 이름 때문에 사람을 죽여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메섹으로 가는 앞에 나타나셔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9:5)라고 하셨습니다.  사울이 핍박한 것이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이며, 사울이 죽인 것이 스데반이 아닌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진다’는 표현은 너무도 구체적이고 생생한 기억입니다.  그는 기억을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의 삶에 이미 각인되어 있습니다.

 

3. 벗어날 있을까? 

 

              여러분!  사람이 자신이 살아온 과거가 부끄럽고 싫다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요?  혹은 이전과는 다른 새사람으로 살고 싶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영화 Selfless에서처럼 만약 불필요한 기억을 지우고 적당하게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낼 있다면.... 그것을 믿고 산다면 그는 정말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우리나라에는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자랑스러운 기록물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조선왕조실록’이라는 것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도 500년의 왕조의 역사를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기록해내지 모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8명의 ‘사관’(史官) 항상 옆에 앉아서 조정의 모든 일을 객관적으로 기록했습니다.  왕권의 개입이 없이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게 했습니다.  현재 권좌에 앉은 왕이 기록을 열람할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록을 열람하고 스스로의 역사를 기록하고 싶어 했던 왕이 있었습니다.  연산군입니다.  비록 그는 폭군으로 살고 있지만 그래도 좋은 왕으로 기록되고 싶었습니다.  사관의 역사의 기록에 개입합니다.  그래서 그가 좋은 왕이 되었을까요?  그는 결국 역사의 기록에 개입한 악한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연산군의 시대는 ‘연산군일기’라는 명목으로 실록에서 구별되어 있습니다.  역사라는 것은 국가 혹은 민족이 소유한 공통의 기억입니다.  어떤 집단에 의해 소유되어서도, 조작되어서도 안됩니다.  부끄러운 것은 부끄러운 대로, 자랑스러운 것은 자랑스러운 대로 기록되고 가르쳐야 합니다.  어떤 것은 교훈이 것이요, 어떤 것은 자부심이 것입니다.  

 

              지금은 누구보다도 존경받는 사역자가 사도 바울, 그에게는 치명적인, 생각하면 할수록 날카로운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스데반을 죽인 일입니다.  그는 기억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교회와 성도들 앞에서 자신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다시 고백합니다.  나는 과거에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음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예수를 핍박했고, 스데반을 죽였고,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나는 항상 그것을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그런 아십니까?  내가 부끄러운 과거를, 수치스러운 기억을, 고통스러운 장면을 잊지 않고 마음에 새기고 몸에 짊어지는지 아십니까?  스데반의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뜻이 삶을 통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내가 나의 옛모습을 기억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의 생명이 삶을 통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의 죽음이 삶에 각인되어야 예수의 생명이 삶을 통해 나타난다.... 논리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기가 막힌 논리입니다.  오직 복음에만 있는 논리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이유, 스데반이 자신의 손에서 죽임당해야 했던 이유를 바울이 깨닫고 삶에 각인해야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의 삶을 통해서 세상에 증거된다는 것입니다.

 

4. 생명으로 나타나다.

 

              아까 제가 드린 질문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저는 여러분들에게 “사람이 자신이 살아온 과거가 부끄럽고 싫다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요?  혹은 이전과는 다른 새사람으로 살고 싶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혹시 여러분, 답을 찾으셨습니까?  사도 바울은 답을 우리들에게 알려 줍니다.  우리들의 모든 부끄러운 과거, 우리들의 모든 죄와 악의 , 우리들의 모든 어둡고 수치스러운 고통과 눈물의 삶은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 비로소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이 세상에 드러나는 통로가 됩니다.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핍박하고 죽인 것을 마음과 삶에 각인하는 이유는 예수의 생명과 은혜가 나를 통해서 세상에 증거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만 죽는 것이 아니라 나도 함께 죽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를 죽인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내가 나의 옛사람을 십자가 앞에 묻었습니다.  내가 스데반을 죽인 줄로 알았는데 하나님은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서 나를 부르시고 나의 옛사람을 스데반의 돌무덤과 함께 묻으셨습니다.  내가 성도와 교회를 핍박하고 가둔 줄로 알았는데, 하나님은 나의 옛사람을 가두시고 나를 복음으로 해방시키셨습니다.  나는 나의 옛모습을 결코 잊지 않습니다.  반드시 기억합니다.  왜냐하면 기억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은혜가 있고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가운데서 자신의 삶을 발견하지 못했을 , 나의 옛모습은 그저 수치이고 고통이고 인생의 함정이고 사슬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품에 품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나의 과거의 인생이 다시 해석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의 수치와 눈물의 삶이 다시 해석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나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나는 과거의 수치와 눈물을 기억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변화시키셔서 죄인의 괴수와도 같은 나를 하나님의 복음과 은혜와 복의 통로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본문을 통한 사도 바울의 고백이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권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다보니 눈물 나는 기억이 많습니다.  자다가도 기억이 나에 대해 폭력을 휘두릅니다.  잊고 싶지만 잊을 없고, 버리고 싶지만 나를 따라옵니다.  나는 평생 고통과 수치의 기억의 노예로 삽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어도 말입니다.  나는 기억을 따라 근심하고 분노하고 눈물 흘립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은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기억을 은혜의 통로로 바꾸는 중요한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우리의 과거의 모든 기억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새롭게 해석될 있습니다.  기억은 은혜의 통로입니다.  나의 모든 과거의 수치와 아픔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을 깨닫는 길입니다. 

 

              바울이 고백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를 복음의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삶을 통해 증거됩니다.  저도, 여러분도, 우리 초대교회도 이런 고백을 함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눈물을 씻으시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복음의 도구로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과거를 기억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 우리의 모든 과거를 씻으시고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1. 토론을 위한 질문

 

1) 기억과 생명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토론해봅시다.  기억을 잃어버리면 생명을 잃은 것일까요?  내가 기억의 능력을 상실한다면 인생의 존재와 의미는 어디에서 찾을 있을까요?

 

2)  잊으려 해도 잊을 없는 사람, 사건이 있습니까?  기억이 나를 괴롭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기도 합니까?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사도 바울은 스데반을 죽인 기억과 예수를 죽인 것을 연결하여 생각하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들의 삶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매다는 것과 같은 치명적인 실수 혹은 범죄가 있지는 않았습니까?  나는 잊을 없는 나의 가장 연약한 모습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습니까?

 

 

4)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아픈 기억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우리 각자의 말로 설명해 봅시다.

 

 

2. 함께 기도하기

 

1) 수시로 나를 괴롭하고 부끄럽게 하는 아픈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하시소.  주님 안에서 인생이 새롭게 해석되며 십자가의 은혜 가운데 나를 바라보게 하소서.

 

2)  지나온 삶의 아픔으로 여전히 고통당하고 있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지나온 삶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가장 은혜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아는 것이요,  교회에 속하게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긍휼을 사모하며 함께 기도합시다.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Beauty Inside na kim 2015.11.09 0 269
다음글 내 마음에 두신 기쁨 na kim 2015.10.27 0 4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