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적 교회- 35. 성도 보통씨의 야외예배 | na kim | 2018-09-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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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9. 16. * 본 문 : 에베소서 2장 19-22절 말씀 * 제 목 : 선교적 교회 - 35, 성도 보통씨의 야외예배
우리 교회는 1년에 한번은 근처에 있는 공원으로 가서 조금은 유난스럽게 예배를 드립니다. 마치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공원이 우리 교회당인 것처럼 꾸미고 준비합니다. 공원에 있는 다른 분들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의 음향을 준비합니다. 성가대도 그대로, 예배 시간도 그대로, 순서도 그대로 합니다. 마침 올해 저희 교회가 야외예배로 드리는 이번 주일은 한 달에 한번 성찬식을 하는 주일이어서 성찬도 나누게 됩니다. 즐겁고 편하고 참 좋습니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 숲에서 부는 바람과 촉촉하게 젖은 잔디까지 모두 예배의 처소가 됩니다. 힘들고 거친 이민의 삶 속에서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을 사모하고 예배하는 일은 의미 있고 즐겁습니다. 예배가 안식이 되고 회복이 되고 은혜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민 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예배당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한인 디아스포라의 시작이었던 구한말 만주나 연해주의 한인들도, 하와이에 사탕수수를 재배했던 한인들도, 멕시코 등의 남미에 정착했던 한인들도, 미대륙으로 건너와서 봉재공장에서 일했던 한인들도 모두 예배당을 중심으로 모였습니다. 그들은 함께 모여 예배했고, 서로가 같은 민족임을 확인했고, 자녀들을 교육했고, 그리움과 아픔을 함께 나누면서 서로를 지키는 든든한 방벽이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인 교회가 예배의 처소를 가질 수 있고, 한국어로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와 교회당 혹은 예배당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장소가 아닙니다. 건물은 더더욱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이며, 관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이고, 신앙을 고백할 때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교회입니다. 십자가의 흔적이 있고, 사랑과 헌신이 있을 때 교회입니다. 용서와 용납이 있을 때 교회입니다. 회개와 회복이 있을 때 교회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눈물로 기도하고, 십자가의 은혜를 마음으로 찬양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성도라고 부르고, 그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할 때 교회가 됩니다. 장소와 건물이 교회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며 섬기며 헌신하며 수고하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교회가 함께 모여 예배하는 장소, 우리는 그 장소를 예배당 혹은 교회당이라 부릅니다. 야외 예배를 드릴 때마다 마음이 즐겁습니다. 그러나 야외예배는 소풍이 아닙니다. 짧고 간단하게 예배드리고 바비큐를 하고 게임을 하는 것이 야외예배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야외예배를 하면서 본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와 같은 순서와 형식을 갖추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손으로 지은 건물보다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고 위대한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간단해야 할 이유가 없고, 짧아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습니다. 오히려 더 간절하고 더 큰 기쁨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기쁨과 영광을 돌려드려야 합니다. 1. 다윗과 솔로몬의 성전 다윗이 문득 백향목으로 지은 자신의 집을 보고, 여전히 천막으로 된 하나님의 성소를 보게 됩니다. ‘아... 이럴 수는 없지... 나는 이제 왕이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화려한 집에 살고 있는데... 하나님은 저기 광야에서부터 케케묵은 천막에 계시다니....’ 그는 나단 선지자를 부릅니다.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습니다. “하나님의 처소를 지어야겠다... 나는 이렇게 영광스럽게 사는데 하나님은 저렇게 초라한 곳에 계시게 할 수 없다....” 다윗의 생각과 말은 맞는 것일까요? 맞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에서 예배했는데, 그 처소가 너무 초라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틀렸습니다. 하나님은 성소에만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막에 갇히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은 있었지만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아들 솔로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 성전에 거하시고, 이스라엘을 축복하시고 보호해달라고 말합니다. 맞는 기도일까요? 맞고 또 틀립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거하시고 그들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시는 분은 아닙니다. 다윗도, 솔로몬도 놓치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장소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억압하며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지 못하면서 자신들만을 위한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은 그들의 성전을 떠나셨습니다. 그들의 예배를 외면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서로를 자신처럼 사랑하는 삶으로 회복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2. 성전의 주인이 된 사람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우리의 신앙의 경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다윗과 솔로몬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다윗과 솔로몬이 가졌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순수한 마음은 잃어버렸는데 말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은 하나님의 임재의식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이스라엘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성전을 사유화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위험한 사람들은 바로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이미 사사시대부터 위험한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은 어땠습니까? 그들은 성막의 주인이었습니다. 제사를 위해 가져온 고기를 탈취하기도 했고, 하나님께 드릴 영광을 먼저 취하기도 했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돕고 섬겨야 할 종의 신분인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백성들 위에 군림하시 시작했습니다. 성전의 모든 행정과 이권을 독점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성전에 가둬놓은 채 성전과 예배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제사를 외면하셨습니다. 그들의 일상의 삶이 그들이 드리는 예배를 부정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 하나님을 가둬놓았기 때문에 성전 밖에서의 삶에 대해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성전에서 예배할 때는 하나님의 백성이자 자녀가 되고, 성전 밖에서는 세상의 질서로 살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세상의 질서는 곧 다시 교회로 밀려왔습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는 세상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교회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면서 “너희가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3. 내가 너 안에, 너희 안에 예배를 상실한 인류의 역사에 하나님이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독생자 예수님이 이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 안에, 그리고 너와 너의 관계 속에, 너희 안에 있겠다. 너희도 내 안에 있으라!” 하나님이 성전, 성소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과 교통하시고 우리의 모임에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심령을 만지시고, 우리 공동체가 드리는 예배를 받으십니다. 건물과 장소가 아닌 우리의 삶과 관계에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존재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셨고, 우리는 비로소 건물이 아닌 우리의 마음과 삶으로, 장소가 아닌 우리의 열린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산에서, 들에서.... 성도들이 모인 모든 곳에서 예배할 수 있습니다. 성도 보통씨의 야외예배는 그래서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건물과 장소가 아닌 하나님을 향한 기쁨과 서로를 향한 헌신 속에서 예배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천지만물이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을 찬양할 것입니다. 4. 함께 지어져가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오늘 본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과 당시 초대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읽혔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함께 지어져가는 교회’라는 개념을 선물했습니다. 이미 완성된 교회가 아니라 서로가 함께 지어져가는 교회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첫째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신앙과 인격들의 교회입니다. 함께 지어져간다는 것이 모두가 각자 이미 완성된 부품으로 조립해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부품인 우리들 자체가 아직 여전히 덜 만들어지고 다듬어졌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그것은 내 개인의 성전을 짓는데 다른 지체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가 완전하고 나는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서로가 부족하고 연약한 지체이지만 서로를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완전하고 성숙해서가 아닙니다. 서로에 대한 의무입니다. 셋째,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각 성도의 발전의 단계가 다르고 성장의 정도가 다릅니다.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성도와 교회로 모이게 하신 것은 서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보게 하시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때로 기다려주고, 때로 함께 걸어야 합니다. 넷째, 마지막으로 지어져간다는 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성되고 성숙한 인격과 관계는 없습니다. 어떤 인격도 성장 중에 있고, 그 어떤 관계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아름다운 예배 가운데 계십니다. 좀 더 하나님께 가까이 우리의 변화된 삶의 열매와 성장하고 있는 관계 속에 임하셨습니다. 성도가 모이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때 가장 큰 은혜이자 예배입니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 충만하게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느끼며 만나며 교제하며 찬양하는 우리들 모두의 좋은 예배가 될 수 있기를 바라고,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교회당에만 계시는 하나님이 아닌 날마다 우리의 삶에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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