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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에 대한 성경적 이해 - 2. 하나님을 경험하다. 이응도 목사 2011-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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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 성경공부

고통에 대하여 - 2. 하나님을 경험하다.


1. 먼저 생각하기


소설가 박완서는 남편을 사별한 뒤 불과 1년이 안되어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교통 사고로 잃게 됩니다. 의대를 졸업하고 마취과 전문의 과정에 있던 아들, 미래가 창창하게 보장되었던 26세 밖에 되지 않은 꽃다운 아들이었습니다. 그녀는 거의 발작하다시피 격렬하게 반응합니다 . 그녀는 하나님께 울부짖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너무 잔인합니다. 너무 잔인합니다. 어찌 인간에게 이렇게 깊은 고통을 줄 수 있습니까? 나에 대한 당신의 사랑, 나의 아들과 남편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이제 믿지 않습니다. 당신은 잔인한 신입니다.” 그녀는 십자가를 팽개쳤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으면 너무 화가 나서 내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아들을 데려간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수많은 날들을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주했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그 시절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온 종일 신을 죽였다. 죽이고 또 죽이고 일백 번 고쳐 죽여도 죽일 여지가 남아 있는 신, 증오의 마지막 극치인 살의, 내 살의를 위해서도 신은 있어야만 했다.!”


훗날 아들에 대한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게 되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만일 그때 나에게 포악을 부리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그분조차 안 계셨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살긴 살았겠지요. 그러나 지금보다 훨씬 더 불쌍하게 살았으리라는 것만은 눈에 환히 보이는 듯합니다.”


소설가 박완서가 경험한 고통과 하나님에 대한 분노를 경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왜 내게 이런 고통을, 내 하필이면 나를, 왜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 이런 아픔을, 도대체 왜, 왜, 왜..?” 라며 울부짖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혹은 주변에 이런 부르짖음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멀어진 사람은 없습니까? 하나님이 이런 고통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 주의해서 성경 읽기


성경에는 고통의 문제로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했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은 요셉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던 수많은 고통의 열매들을 삶으로 견뎌야 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다양한 고통과 아픔에 대해 묵상해 봅시다. 각각의 상황 속에서 나의 삶에는 유사한 일이 있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봅시다.


1) 창 35:16-20 어머니 라헬의 죽음


2) 창 37:1-4 아버지의 편애와 형들의 질투


3) 창 37:1-11 요셉의 꿈과 형들의 시기


4) 창 37:12-17 “그가 들에서 방황하는지라”(37:15)


5) 창 38:18-24 죽음을 경험하다.


6) 창 37:25-28 노예로 팔려가다.


7) 창 39:7-18 억울한 누명을 쓰다.


8) 창 39:19-23 감옥에 갇히다.


9) 창 40:14-15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토로하다


10) 창 40:23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더라”



3. 깊이 묵상하기


하나님은 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고통과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고통은 우리들의 삶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요? 다음의 몇 가지 예를 함께 생각해 봅시다.


금붕어는 자연 상태에서는 약 1만개의 알을 한꺼번에 낳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위험도 없이 적당한 온도와 먹이가 공급되는 어항에서는 얼마나 알을 낳을까요? 약 3-4천개 밖에는 낳지 않는다고 합니다. 알을 생산할 수 있는 조건이 더 좋음에도 불구하고 그 생산력이 현저하게 감소하는 것이지요.


그뿐 아닙니다. 활어를 잡아서 각 지역에 운송하는 방법은 재미있습니다. 관상용 열대어를 공급하는 회사에서 수송하는 과정에서 절반 이상이 죽어가자 고민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 환경생태 학자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그는 두 가지를 조언했습니다. 첫째는 아주 사나운 문어를 한 마리 넣어주고 둘째는 물살을 일으키라는 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열대어는 대부분 살아서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결과에 놀란 회사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학자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건 당연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고통과 싸우며 성장합니다. 너무 편하면 죽습니다.”


곤충 학자였던 찰스 코우만 여사는 자신의 실수담을 들려줍니다. 그녀는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위해서 고치 구멍을 뚫고 나오는 과정을 긴 시간 동안 관찰했습니다. 나비는 작은 고치 구멍을 뚫고 나오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코우만은 긴 시간 몸부림치고 있는 나비가 안스러웠습니다. 가위를 가져와서 고치의 구멍을 조금 넓혀 주었습니다. 나비가 고치를 벗어나서 화려한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날아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비는 아직 젖은 날개를 끌고 이리저리 바닥을 왔다 갔다 하더니 힘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나비는 고치를 벗어나는 과정을 통해서 하늘을 힘껏 날 수 있는 날개의 힘을 키워야 했던 것입니다.


C.S. Lewis는 ‘고통의 문제’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통스런 일이 생기기 전에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고통이란 영적으로 귀를 막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만드는 확성기와 같다.” 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C.S. Lewis의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탕자는 자신의 성공과 즐거움을 위해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세상에서 모든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즐거움이 다하고 고통의 시간이 찾아옵니다. 그는 평생에 처음 아버지를 그리워합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따뜻하고 풍성한 사랑 가운데 있을 때에는 아버지를 몰랐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것,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고통이 그를 깨웁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도록 만듭니다. 고통은 탕자로 하여금 아버지를 깨닫게 하고 아버지께로 회복하게 하며 아버지께로 돌아갈 수 있도록 ‘열려 있는 길’인 것입니다.


탕자가 고통 가운데 아버지를 기억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 길 끝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아버지는 자신을 버리고 집을 나갔던 아들보다 더 큰 고통과 눈물로 그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고통 가운데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고통이라는 길을 통해 돌아오고 있는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비로소 아들은 아버지를 새롭게 만나게 됩니다. 이전에도 아들은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알았습니다. 고통 중에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자신의 인생은 없습니다. 그는 고통을 통해 비로소 아버지를 참되게 만난 것입니다.


4. 적용하기


고통의 과정을 지난 욥은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그는 고통을 경험하기 전에도 동방의 의인으로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아직 제대로 몰랐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하나님에 대해 귀로만 들었었는데 고통을 경험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고통 가운데 고민하고 통곡했더니 이제 그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고통이 없었다면 평생 자신의 의와 믿음이 충분한 줄 알고 교만하게 살았을 것이지만, 고통과 고난이 그를 깨웠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스스로 (모든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6)


어쩌면 우리가 흘리는 고통의 눈물은 마치 자동차의 유리창을 닦는 와이퍼액과도 같습니다. 그 눈물은 교만과 세상에 대한 분주한 생각과 욕심과 죄악으로 더러워져서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우리들의 마음의 눈을 닦아줍니다. 고통의 눈물을 흘린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제대로 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습니다.


“왜 하필이면 내 아들을…”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왜 꼭 나이어야 하고… 내 아들이어야 합니까?”라며 울부짖던 박완서에게 마음 깊은 곳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왜 너의 아들은 안된다는 거냐? 너와 너의 아들은 자신들을 위해 슬퍼하지만 나와 내 아들은 너희를 위해서 죽임당하고 슬픔을 당했는데… 세상에 슬픔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이렇게도 많은데… 세상에 아직도 눈물 흘려야 할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네 아들이 안된다면 도대체 누구여야 한다는거냐? 왜 너는 절대 안된다는 거냐?”


비로소 그녀는 아들의 죽음과 자신의 삶에 다가온 고통을 수용하게 됩니다. 자신은 그저 자신을 위해 아들의 죽음의 고통을 못참겠다고 울부짖고 있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아들의 죽음이라는 고통을 참으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들의 죽음의 고통을 통해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고통스러운 사랑을 깨달은 것입니다. 잔인하신 하나님, 사랑 없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들이 고통 가운데 계신 하나님, 눈물 흘리시는 하나님, 우리의 고통을 끌어안고 우리보다 깊은 울음을 울고 계신 하나님을 다시 만난 것입니다.


고통 가운데 있으십니까? 우리의 고통에 동참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성장하시기 바랍니다. 고통 끝에 허락된 성숙의 열매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의 고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성장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의 모든 눈물에 동참하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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