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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에 대한 성경적 이해 - 3. 십자가를 가슴에 안고 이응도 목사 2011-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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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 성경 공부 / 고난에 대하여 3. 십자가를 가슴에 안고 (마 16:21-25)

1. 먼저 생각하기


하루는 외아들을 잃은 한 과부가 석가모니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통곡하며 울면서 제발 외아들을 살려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과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석가모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조건이 있다. 내가 네 아들을 살려줄테니 너는 저 동네로 가서 해바라기 씨 하나를 얻어오너라. 단 해바라기 씨를 얻어오되 한 번도 죽음의 슬픔을 겪어보지 않은 집에서 얻어 와야 하느니라.”


과부는 아들을 살려준다는 말에 황급히 마을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집집마다 들러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온 마을이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죽음을 알리고 혹시 이집에는 자신과 같은 경험이 있는지, 없는 집은 없는지 물어보다보니 집집마다 죽음이라는 고통의 과정을 경험하지 않은 가정이 단 한 가정도 없었던 것입니다. 과부의 눈물 나는 사정을 들으면서 자신들이 고통스러웠던 경험을 떠올리고는 함께 끌어안고 울었던 것입니다.


온 동네를 다니며 실컷 울고 또 운 과부는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아들이 다시 살아 돌아온다고 해서 다시는 죽음의 과정을 겪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니요, 자신이 죽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녀는 아들의 죽음을 비로소 받아들이기로 결심합니다. 슬픔을 함께 나누었더니 용기와 지혜가 생긴 것이요, 다른 사람의 슬픔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2. 주의해서 성경 읽기


인간의 고통, 이것은 인류가 안고 있는 오랜 문제였습니다. 모든 종교와 철학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 답을 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안타깝게도, 아니 슬프게도 아무도 그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했습니다.


성경 또한 마찬가지일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에서 고통을 제거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마저도 우리의 고통에 대하여 함께 고통스러워하시고 그 고통을 함께 감당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고통은 “해결할 것인가? 해결하지 못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들이지 못하는가?”의 문제인 것입니다. 다음의 말씀들을 읽으며 성경이 말하는 고난 혹은 고통에 대한 바른 입장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1) 마 16:16-24


예수님이 고통에 대해서 하신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영어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If anyone would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마 16:24)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려거든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삶에 놓인 십자가를 ‘take up’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take up’한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요?


2) 고후 7:4, 12:10


과연 성도는 고통과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만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을 통해서 답을 찾아봅시다.


3) 마 16:25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제자들에게 권면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이 말씀과 고린도에 보낸 바울의 편지(고후 7:4, 12:10)에서 공통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4) 찬송가 470장을 가사를 묵상하며 함께 불러 봅시다.



3. 깊이 생각하기


예수님 사역의 핵심을 한 단어로 줄이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고통을 해결하시는 것이 아니라 동참하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보다 더 큰 고통, 우리가 도저히 자신의 뜻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자신의 의지와 결단으로 동참하십니다.


그리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나를 따라오려느냐? 나와 같은 천국의 소망을 가지려느냐? 이 땅 가운데 나를 믿는 사람으로, 나의 교회로, 나의 성도로, 나의 형제요 자매로 살아가려느냐? 너희에게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는 고통이 있을 것이다!” 제자들은 이 말씀이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조금 전에 아름다운 신앙 고백으로 칭찬을 들은 베드로가 대표로 말합니다. “선생님, 안됩니다.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와 선생들은 자신을 따르면 고통이 사라지고 소원이 이뤄진다고 말하는데 왜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고통을 말씀하십니까? 우리에게 그런 길 말고 좀 쉽고 평탄한 길을 주십시오.” 예수님은 베드로를 꾸짖으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썩 물러가라! 너는 십자가를 통해 만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외면하고,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편안한 삶의 거짓된 환상을 교회에 심어주려 하는구나!”


고통은 우리 가운데 실존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외면하거나 부정할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복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심리학자였던 폴 뚜르니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십자가를 단순히 지고 가라고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쁘게 지고 가라고 가르친다. 그리스도교는 단순히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라고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운명에 대해서 아무리 그것이 힘들고 가슴 아픈 일이라고 할지라도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십자가는 어쩔 수 없이 내가 질질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가슴으로 안고 가는 것입니다. 고통 앞에 무릎 꿇는, 신음하며 원망하며 슬퍼하며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 아니라, 고통의 현실을 인정하고 가슴으로 그것을 끌어안고 주님의 뒤를 따라는 믿음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통도 기쁨도 삶의 한 부분입니다. 살아 있지 않다면 고통도 갈등도 눈물도 없을 것입니다. 무덤에는 더 이상 고통도 눈물도 없지만, 생명도 기쁨도 삶의 의미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고통 앞에 무릎 꿇는 삶이 아니라 고통을 대면하고 극복하는데 있습니다. 십자가를 가슴에 안고 주님과 함께 우리 인생의 골고다를 올라가는 것입니다.


4. 삶에 적용하기


마 16:25의 말씀과 고후 7:12, 12:10의 공통된 강조점은 ‘그리스도를 위하여’라는 말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에게 다가온 모든 고통과 고난의 현실을 기쁨과 감사와 위로 가운데 극복해 나갈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5절에서 예수님의 권면은 ‘목숨을 버리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목숨을 버리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살아가는데 있습니다.


‘태왕사신기’라는 대하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광개토대왕이 백제와 전쟁을 준비하면서 아직 채 준비되지 못했고 수적으로도 약한 자신의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죽지 마라. 무모하게 죽음으로 충성을 보이려고 하지 마라. 나는 무모한 충성심으로 목숨을 함부로 버리는 병사를 원하는 게 아니다. 나를 위하여 끝까지 살아서 내 옆에 있어줄 부하가 필요하다.” 무모한 충성심으로 목숨을 버리는 부하는 어리석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책임감이 없는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목숨을 버리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왕이 원하는 승리를, 목적을 이루는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우리의 고통 자체는 아닙니다. 고통 가운데 쓰러지거나 낙심하거나 고통에 치여서 인생이 고통 자체로 변하는 것은 더더욱 아닐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우리 앞에 놓인 고통의 인생길을 걸어가는 목적과 이유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위하여”입니다. 바로 그때 고통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는 아름답고 거룩한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고통의 인생을 기쁨으로 감당하고 주님은 우리의 고통의 인생길에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의지적으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였습니다. 자신이 당하지 않을 고난까지 그리스도를 위해 감당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바울은 고통의 희생자, 상황의 희생자가 아니라 주인공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당하는 수동적인 고통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능동적으로 받는 고통입니다. 그는 그 속에서 자신의 고통과 동행하시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고통의 상황이 나를 콘트롤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고통의 상황을 주도적으로 극복하면서 그 속에서 오히려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주님 안에 있는 평화를 누립니다.


찬송가 470장에 얽힌 사연이 있습니다. 작사자인 스파포드는 시카고에 대화재가 일어나 모든 재산을 다 잃었습니다. 그는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유럽 여행을 함께 떠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대화재 때에 피해를 입었던 무디 교회의 일로 함께 여행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부인과 네 딸이 타고 가던 여객선이 영국 배와 충돌하여 모두 사망하게 됩니다. 그는 아내와 딸이 사망한 대서양 바다를 지나면서 이 찬양을 작사했습니다. 그가 자신의 영혼을 평안하다고 고백하고 찬양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는 자신에게 밀려온 고통 가운데 함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저 마귀는 우리를 삼키려고 입 벌리고 달려와도 주 예수는 우리의 대장되니 끝내 싸워서 이기겠네” “내 지은 죄 주홍빛 같더라도 주 예수께 다 아뢰면 그 십자가 피로서 다 씻으사 흰 눈 보다더 정하겠네”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며 큰 나팔이 울려날 때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겠네” 그는 고난의 한 복판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었고 그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슬퍼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는 그 속에서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 그리스도 안에서 참 평안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으십니까? 눈물 흘리고 계십니까?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고난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고통의 십자가는 우리가 가슴으로 안고 가야 할 면류관입니다. 외면하거나 끌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슴으로 품고 가는 십자가의 길에 우리와 동행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참 평안을 발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고난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은혜와 참 사랑을 만나는 능력의 삶, 승리하는 성도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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