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곳에 있어도...." | 이응도 | 2017-01-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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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곳에 있어도....’ 혹시 ‘히말라야’라는 영화 보셨습니까? 오늘은 이 영화에 대해 좀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산악인 엄홍길씨 고 박무택씨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엄홍길은 2000년 히말라야에서 세 번쩨로 높은 카첸중가라는 산을 오를 팀을 모집합니다. 박무택은 팀의 막내로 합류하게 됩니다. 두 사람은 가장 절치한 동료이자 형제처럼 지내면서 짧은 기간 동안 8000m 이상의 히말라야 고봉 중에 4개를 더 등반합니다. 2004년, 박무택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옵니다. 자신이 등정대장이 되어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를 등정하게 된 것입니다. 8850m의 정상 등정에 성공한 후 하산하는 길 8750m 지점에서 박무택과 함께 정상에 올랐던 정민은 탈진하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정민을 돕던 박무택은 ‘설맹’(雪盲)에 걸려서 앞으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박무택은 산악인의 원칙을 지킵니다. 자신은 이미 가망이 없으므로 후배에게 혼자 내려갈 것을 명령합니다. 정민은 울면서 하산합니다. 베이스캠프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원정팀에서는 세계 각국에서 온 산악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모두 거절당합니다. 이미 밤이 오고 있고, 폭풍이 몰아쳐서 2차 조난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너무 높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하고 합리적인 판단입니다. 한 때는 동료였던 다른 한국 원정대조차도 구조를 거절합니다. 이때 6400m 지점의 베이스캠프와 정상 사이에서 2차 캠프를 치고 정상 공격팀의 하산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영화에서는 ‘박정복’이라는 이름으로 나오지만 실명은 ‘백준호’라는 인물입니다. 박무택과는 대학에서부터 함께 산을 타던 동료였습니다. 간절하게 애타게 도움을 청했지만 아무도 돕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자신이 혼자 구조등반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베이스켐프에서 안된다고 말리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님,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봅시다. 무택이가 여기에 있고 우리가 위에 있다면 말입니다... 무택이는 우리를 꼭 데리러 왔을 겁니다. 나는 올라갑니다.... 형님, 복잡하게 생각하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나는 그냥 올라 갈랍니다.” 그가 박무택을 향해 출발한 시간이 저녁 6시, 그리도 박무택을 발견했다고 무전이 온 것은 다음날 새벽 5시였습니다. “형님, 무택이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무택이가 동상이 많이 걸렸네요. 좀 어렵겠습니다. 그리고 저도 좀 힘들겠습니다.” 백준호는 박무택이 임종할 때까지 자리를 지킵니다. 그리고 시신이 유실되지 않도록 빙벽에 잘 묶어두고 자신은 하산합니다. 먼저 하산했던 정민도, 백준호도 결국 산이 되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엄홍길에 대한 평가가 다양하고 사실관계에 대한 분분한 의견이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 영화를 볼 가치는 두 장면에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첫 장면은 이미 소개했습니다. 모두가 상식을 말하고 안전한 선택을 할 때, 죽어가는 친구를 위해 얼음보다 차갑고 죽음보다 어두운 밤길을 한걸음씩 올라가는 한 사람의 모습... 참 좋았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뒷 부분이 엄홍길씨의 인터뷰 장면이 나옵니다. 기자들이 묻습니다. “한국 산악 역사에 가장 위대한 산악인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혹시 자신입니까?” 그러자 엄홍길은 눈시울을 적시면서 말합니다. “2004년 5월 18일 길고도 차가웠던 밤, 에베레스트 8750m지점을 올랐던 고독한 산행이 있었습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아직도 돌아오지도 못했지만 내가 그 자리에 있고, 그 그가 내 자리에 있었더라도 그 또한 나와 같은 선택을 할 것임을 믿으면서 묵묵히 산을 올랐던 한 사람이 있었는데, 나는 그 사람을 최고의 산악인으로, 그의 산행을 최고의 산행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잘... 사는 사람으로 사는데 필요한 것은 지식과 능력일 것입니다. 적당한 양심과 신앙도 양념이 되면 좋습니다. 충분히 계산했고 잘 따져봤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는 히말라야가 없습니다. 더 높은 이상이 없습니다. 철저하게 이 땅의 논리로 살아갈 뿐, 인간이 누리고 추구해야 할 좀 더 높은 영적 쾌감을 맛볼 수 없습니다. 선지자의 무덤이 있던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옮기셨던 예수님, 자신의 형틀과 무덤이 준비되어 있는 줄 알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의 만류를 뿌리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바울 또한 그렇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람의 상식을 뛰어넘는 믿음의 선택을 했던 사람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 삶에 하나님의 기쁨이 있고, 성도와 교회의 영적인 쾌감이 숨어 있습니다. 찰팍대는 즐거움이 아닌, 투명하고 높은 기쁨을 따르는 삶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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