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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기쁨에게 이응도 2017-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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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기쁨에게

 

한국 MBC의 한 음악방송에서 지친 당신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는 노래라는 제목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그 질문이 온다면 어떤 노래를 선택하시겠습니까? 20대에서 40대까지 고르게 1등을 한 노래가 있습니다. 인순이의 거위에게라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원래 인순이의 노래가 아닙니다. 카니발이라는 2인조 그룹의 이적이 노랫말을 쓰고 김동률이 곡을 썼습니다. 물론 노래가 좋아서 그들이 부를 때도 인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 케이블 드라마에서 이 노래를 OST로 쓰면서 인순이에게 노래를 부탁했습니다. 드라마도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인순이가 부른 이 노래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가 원래부터 인순이의 곡인 줄 알 정도입니다.

 

물론 인순이가 노래를 워낙 열심히 잘 하는 가수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인순이가 부른 이 노래가 원작자보다 드라마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움직인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원작자인 김동률과 이적은 서울대학 출신의 엘리트들입니다. 그들이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라고 노래하는 것은 다소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순이가 노래하면 다릅니다. 이 노래에서 우리는 인순이의 삶을 볼 수 있고 눈물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순이는 한 프로그램에서 자신이 너무 빨리 철이 들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있는 미국, 자신과 어머니를 책임지지 않고 떠난 아버지의 나라로 가지 않기로 어려서부터 결심했다고 했습니다. 쉬운 결심이었을까요? 이곳 한국에서 혼혈, 그것도 흑인 혼혈인이 겪는 어려움보다 자신을 버리고 간 아버지의 나라에서 받을 서러움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어려운 성장의 과정을 경험했을 그녀를 보면서 거위의 꿈을 들으면, 그 자체가 감동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전에도 한번 소개한 시가 있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슬픔이 기쁨에게라는 시입니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로 시작하는 이시는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로 끝이 납니다.

 

이 시를 처음 접할 때는 감각적인 감성이 돋보인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알겠습니다. 시인의 말이 맞습니다. 슬픔에는 힘이 있습니다. 슬픔에는 지혜가 있습니다. 슬픔에는 자기 발견이 있고 고백이 있습니다. 슬픔에는 쉼이 있고, 비로소 이웃을 향한 시선과 이해가 있고, 이웃을 포용하고 섬길 수 있는 가슴이 있습니다. 슬퍼하는 사람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슬퍼하는 사람이 변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이 땅에 사는 우리들에게 천국의 복을 가르치시면서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복 있다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5:4)

슬퍼하고 아파하는 것이 애통입니다. 이것이 복이 될 수 있을까요? 내가 사회적인, 혹은 개인적인, 혹은 질병이나 관계에서 고통을 당할 때 그 고통 자체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은 내가 그런 고통 속에 있어도 하나님은 나의 주인이 되시며 아버지가 되시며 나를 구원하신다는데 있습니다. , 세상이 주는 고통 속에서 부숴지고 무너진 나를 하나님은 여전히 변함없이 사랑하신다는 사실, 내가 돌아갈 품이 있고 피할 요새가 있다는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이 위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큰 복이 있습니다. 내 삶에 감각할 수 있는 고통이 없는 것 같은데... 내가 내 안에 있는 죄의 뿌리와 악의 그림자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가슴을 치며 엎드릴 수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위로하시고 긍휼히 여기실 것입니다. 우리의 죄성을 여러 가지 말과 논리로 변명하려 하지 말고 애통하면서 하나님께 엎드려야 합니다. 복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나 아닌 이웃의 삶에 발생한 고통에 대해 함께 슬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장 좋은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우리의 죄와 악을 보시고, 심지어 우리가 그 죄와 악 속에 살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즐기며 만족하며 사는 것을 보시고 더 아파하시고 더 슬퍼하셨습니다. 그 애통한 마음으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애통할 줄 아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로하시고 그를 통해서 세상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위로하실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 대한 애통함을 잃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애통한 일입니다. 교회와 성도의 애통함이 하나님의 위로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함께 눈물 흘리며 가슴을 칠 수 있는 애통할 수 있는 교회와 성도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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