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대왕 | 이응도 | 2017-01-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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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Lord of Flies) 윌리엄 골딩이라는 소설가를 아십니까? ‘파리 대왕’(Lord of Flies)이라는 작품을 쓴 사람입니다. 이 작품으로 노벨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인간의 야만성과 폭력성에 실망하게 됩니다. 자신 또한 군인이 되어 전쟁을 경험해보니 ‘인류가 서로를 죽여서 얻을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왜 이렇게 서로를 죽고 죽이는가?’를 고민합니다. 그가 찾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인간의 본성으로서의 종교성입니다. 파리대왕이라는 작품은 영국 정부가 핵전쟁의 위험 앞에서 5세에서 12세까지 25명의 소년을 선발하여 안전한 지역으로 옮기는 작전을 실행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불행하게도 소년들을 태운 비행기는 공격을 받아 추락하고 소년들은 무인도에 상륙하게 됩니다. 소년들은 처음에는 서로 돕고 협력했지만 곧 의견이 대립되고 분열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 분열을 부추기고 극대화시키는 장치로 작가는 사람의 내면에 있는 두려움과 종교성을 사용합니다. 소년들은 섬 한 가운데에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존재를 만납니다. 실은 죽은 낙하산병의 시신이 낙하산에 휩싸여 있는 것이었는데, 소년들은 그것을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으로 생각하고 큰 두려움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의 대상에게 멧돼지를 잡아 머리를 바치는 제사행위를 합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윌리엄 골딩은 중요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인간의 종교성은 환경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본성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죽은 시체에 불과한데, 두려움에 자극된 소년들은 제물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제사의식을 행합니다. 마치 제물로 드려진 멧돼지의 머리에 웽웽거리며 날고 있는 파리처럼 두려움에 떨면서 제사의식에 취해가는 소년들을 묘사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16-31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아테네를 방문합니다. 그곳에 가보니 기가 막힙니다.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행 17:16)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스토아 학파와 에피큐로스 학파의 철학자들을 모아놓고 설교합니다. “내가 여러분을 만나보니까 여러분에게 모든 일에 종교성이 정말 많습니다. 어떻게 ‘알지 못하는 신에게’까지 제사를 드립니까? 오늘 내가 여러분에게 바로 그 알지 못하는 신, 하지만 참 신을 증거하려고 합니다.”(행 17:22-23) 당시 이 두 철학은 가장 발전되고 고양된 지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철학을 하는 학자들이 두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의 지식과 학문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그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이 섬기는 신을 위한 신전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알지 못하는 신들’을 위한 제단까지 만들었습니다. 아무리 그 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이라고 해도 인간의 본성 속에 숨어 있는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참된 신앙을 발견하지 못한 철학자들은 종교적으로는 파리대왕에 나오는 12세 소년들의 수준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정치 철학에 가까운 유교가 왜 제사의식을 행할까요? 결국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불교는 알고 보면 종교보다는 생활 철학에 가깝습니다. 삶을 고통으로 놓고 그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상태를 지향합니다. 그런 불교에도 각종 토속신을 모시는 제사의식이 있습니다. 역시 통제되지 않는 삶의 환경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거짓 종교, 사이비 신앙, 혹은 왜곡된 권력과 권위는 사람의 두려움과 염려를 자극합니다. 그 위에 그들의 이익을 위한 견고하게 집을 짓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를 위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려워 말라!”라고 말합니다. 이전에는 세상을 따르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습니다. 세상처럼 하지 않으며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금송아지를 찾고 돼지 머리를 걸고 두려움과 염려로 날마다 손을 비비며 살았습니다.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아도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살아보니... 전혀 다른 삶이 펼쳐집니다. 담대할 수 있습니다.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도, 말씀대로 살아도, 십자가의 길을 걸어도 됩니다. 마음과 삶을 하나님께 맡기는 법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과 사귀니까 세상이 우스워졌습니다. 두려움과 염려가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주님과의 사귐에 성공했고, 그 사귐의 맛은 세상의 그 어떤 두려움도 넉넉히 이길 만큼 매력적입니다. 자유가 있고 평강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담대하게, 두려움과 염려 없이 살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참된 평안이 있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입니다. 모두가 함께 넉넉히 누리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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