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아버지, 가장 좋은 유산 | 이응도 | 2017-02-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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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아버지, 가장 자랑스러운 유산
제가 미국 유학을 결정하고 한참 준비에 열심을 낼 때 갑자기 IMF가 터졌습니다. 1997년 말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나... 환율이 달러 당 1900원을 오르내리고, 온 국민이 금을 판다고 줄을 서던 시절이었습니다. 모아두었던 얼마 되지 않는 자금이 반 토막이 나고, 마음에 제법 큰 낙심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거제도에 계셨던 외할아버지께서 갑자기 찾아오셨습니다. 외할아버지는 ‘거제 옥장로’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30대에 장로가 되셔서 당시 80대까지 대쪽같은 성품과 깨끗한 신앙으로 많은 존경을 받는 분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런 할아버지가 한 없이 무서웠는데 나이가 좀 드니까 좋아하게 되고 자주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주로 저와 아내가 찾아뵈었었는데 아무런 연락 없이 갑자기 찾아오신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저를 앉혀놓고 딱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유학은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집을 하나 사야겠는데 1000만원을 내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정말... 이 두 가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연결이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유학을 꼭 가라고 말씀하시고 품에 꼭꼭 숨겨뒀던 비자금을 턱~ 내놓는다... 뭐 이런 것이 드라마에서 보는 그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유학을 가라고 하고는 돈을 달라고 하시니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의 이해할 수 없는 결심은 꽤 단단해보였습니다.
그 집은 할아버지께서 태어나고 자랐던 집입니다. 친척들이 살고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사고 싶다고 하시니까 850만원에 파시겠다고 했습니다. 환율도 좀 떨어지고, 더 떨어질 것 같다는 예상이 지배적일 때, 850만원을 드려서 결국 집을 샀습니다. 거제도 삼거리라는 곳에 있는 촌집... 앞에는 논이 있고, 뒤에는 산이 있는 금방 쓰러질 것 같은 집을 할아버지께 사드리고 1998년 8월에 저희는 이곳 필라델피아로 왔습니다.
유학을 와서는 바쁘기도 하고 정신이 없어서 잊고 지냈습니다. 할아버지는 그 집에는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다음 해 4월에 소천하셨습니다. 2-3년이 더 지났습니다. 가지고 온 자금도 다 떨어지고 다음 학기를 걱정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누가 그 집을 사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친척 분들이 그대로 살고 계시고, 우리는 계약서 한 장 주고받은 일이 없었습니다. 어머니 원하시는 대로 하시라고 했습니다. 1300만원에 집이 팔렸습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환율이었습니다. 제가 유학을 올 때 달러 당 1500-1600원 정도였습니다. 850만원을 달러로 바꾸면 얼마나 되었을까요? 그런데 그 집이 다시 팔릴 때쯤에는 환율이 1000원에서 1100원 사이에 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께 용돈을 마음껏 쓰시고 남은 것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우와....학비와 생활비가 한꺼번에 해결되었습니다. 그래봐야 별로 많지도 않은 돈으로 뭐 그렇게 구구절절 이야기하느냐고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돈의 크기에 대해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할아버지는 제가 유학을 떠나올 때 재정적으로 도와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많이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내나 저나 조금도 섭섭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할아버지는 저희 후손들에게 아주 중요한 유산을 남겨주셨기 때문입니다. 20대, 거제도 옥씨 집안의 장손으로 처음 예수를 믿고 거제도에서 하나 밖에 없었던 ‘술도가’를 정리했습니다. 일가친척 모두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했습니다. 한국에 목사님들 중에서 옥씨 성을 가진 거제도 출신의 목사님들이 많습니다.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공부하신 분들입니다. 나이 80이 되셨어도 교회에 분쟁이 생기면 노회에서 할아버지를 파송하셨습니다. 새벽부터 교회당에서 기도하시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권면하고 교회를 안정시키셨습니다. 요즘도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마음이 좀 힘들고 어려워도... 든든하게 생각되는 것이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던 모습을 봐서인지... 지금도 저와 가정을 위해,, 목회와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계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보여주신 삶과 허락하신 이 믿음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유산입니까? 저에게 있어서 할아버지는 하나님이 주신 유산이자 기업입니다.
지금도 가끔 저희 집에 찾아오셔서 시골 집을 사겠노라고 떼를 쓰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립습니다. 앞으로 있을 일의 결과를 미리 아신 것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할아버지의 기도와 삶을 통해서 모든 것을 선하게 인도하셨음을 믿습니다. 할아버지를 통해 주신 귀한 믿음과 말씀으로 오늘을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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