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입니까? 확실합니까?”
얼마 전에 성도 중 누군가가 제게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묻더군요. 처가가 삼천포에 있어서 자주 듣는 질문입니다. 사실 저도 딱히 정확한 답은 모릅니다. 다만 여러 설 가운데 제가 생각하는 가장 설득력 있는 답은 이렇습니다.
1965년에 진주와 부산을 잇는 기차가 개통되었습니다. 지금은 진주에서 광주까지가 개통되어 부산, 경남, 전남을 잇는 기찻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삼천포는 진주에서 남쪽으로 약 30분 걸리는 작은 어업 도시였습니다. 어획량이 부산, 인천 다음으로 많고 일본으로 통하는 무역량도 많았기 때문에 기차 통행이 필요했습니다. 처음 개통한 부산 진주간 기차는 전동차를 제외하고 총3량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중 마지막 한 량은 삼천포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삼천포와 진주를 오고 가는 전동차가 삼천포에서 한 량을 끌고 와서 부산에서 진주에 온 기차에 붙여주고 그 기차에서 또 다른 한 량을 끌고 삼천포로 내려가는 방식이었습니다.
가끔 술을 먹거나 이런 실정을 잘 몰랐던 여행객들이 자기 자리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기차를 탑니다. 종착역이 부산 혹은 진주이니 마지막까지 가면 된다고 생각을 하고 느긋하게 잠을 잡니다. 그런데 깨어보니 모르는 곳에 와 있습니다. 어디 일까요? 예, 삼천포입니다.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진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물어보십시오. 왜 이곳 삼천포에서 헤매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시다. “글쎄요. 나는 부산 가려고 했는데....”
얼마 전에 엄청난 인기 속에 방영되었던 ‘시크릿 가든’에서 주인공이었던 현빈이 유행시켰던 대사가 있었습니다. “최선입니까? 확실해요?”라는 말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저는 제가 만일 그 말을 듣는다면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나는 최선의 인생을 살고 최선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가?”하는 고민이지요.
‘최선을 다하는 인생’은 ‘열심 있는 인생’과는 조금 다릅니다. ‘최선의 인생은 그야 말로 최고(最高)로 선(善)한 인생(人生)’입니다. 최고의 선, 최고로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그저 열심히, 그저 땀 흘리는 것만으로는 분명히 부족합니다. 잘 나가다가, 아니 잘 나간 줄 알았는데 삼천포로 빠질 수도 있습니다. 열심히 했는데,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열심히 섬기고, 열심히 봉사했는데..... 나의 삶의 자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자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달란트 비유에서 칭찬을 받는 두 종과 책망을 받는 한 종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일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윤을 남겼는가?’에 있지도 않습니다. 이들의 차이는 바로 ‘주인의 생각을 이해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들은 종을 보십시오. 그는 주인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주인의 집에서 먹고 마십니다. 그는 여전히 주인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저 살아가는 모습만으로는 다른 두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의 차이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너무도 다른 결과를 주인 앞에서 맞이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악하고 게으른 종은 주인의 생각과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일하는데 게을렀던 것이 아니라 주인의 생각을 알고자 노력하는 일에 게을렀습니다. 그는 문 밖에 쫓겨 나가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알고 보면 마태복음 25장에 나타난 세 비유가 다 그렇습니다. 1-13절까지의 혼인 잔치 비유에서 등불의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와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성경은 그것을 ‘슬기’에 있다고 말합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등잔 기름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31-46절의 양과 염소 비유도 그렇습니다. 마지막 날 심판대 앞에서 왼편에 염소로 분류된 사람들이 하나님께 항의를 합니다. 왜 우리는 부지런히 믿는다고 믿었는데 이렇게 심판의 대상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왕이 말합니다. 너희는 너희의 열심히 종교생활을 했지만 나를 섬긴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왕을 섬길 수 있느냐고 묻는 그들에게 왕이 말합니다. 세상에 지극히 작은 자들이 곧 나의 다른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향한 왕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 안에 있는 열심만으로 종교생활을 한 것입니다. 마 25장의 세 비유에서 왕과 함께 기쁨의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왕의 생각을 알아서 순종한 사람들입니다. 쫓겨난 사람들은 왕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왕의 생각에 우리의 인생을 향한 참되고 거룩한 지혜가 있다는 사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지식이자 믿음입니다.
최선의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칭찬받는 인생을 살고 싶으십니까? 바쁜 걸음 멈추어 서서 생각합니다. 점검합시다. 고민합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칭찬은 우리의 열심의 양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 지혜로 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한 인생, 하나님의 지혜로 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응도 목사 / 필라델피아 초대교회, 가정 상담 연구원
215-869-5703, edwinl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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