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교무와 만나다.
요즘 필라델피아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매주 글을 싣다 보니 재미있는 일이 가끔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독자로부터 전화를 받는 일입니다. 신문에 올린 글에서 소위 지나친 은혜를 받았던지, 거부감을 느꼈던지, 혹은 하소연을 하든지 여러 가지 이유로 전화를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중 지난 월요일에 정말 재미있는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원불교라는 종교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불교에서 출발했지만 불교와는 교리를 달리하는 새로운 종교라고 볼 수 있는, 한국에서 출발한 종교입니다. 원불교에는 여자 성직자들이 많습니다. 한국에 있는 원광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면 그들에게 ‘교무’라는 직책을 준다고 합니다. 수행을 하는 교무가 있고, 가르치는 교무가 있는데, 지난 월요일 원불교 필라델피아 교당에서 일하고 있는 ‘진교무’라는 분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내가 싣는 글이 자신의 생각과 통하는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날 오후 그 분을 만났습니다.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는 중에 내 글이 어떻게 그분의 생각과 통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 분 말씀이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서 맥락을 같이 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원불교에서 펴내는 ‘마음 수련’이라는 책자를 보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책에 보면 마음을 닦고 조절하는 일의 중요성을 잘 기록하고 있는데, 상담에 있어서 마음의 중요성과 기능을 강조하는 내 글에서 비슷한 점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1시간 3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주 독서량도 많고 종교 일반에 대한 상식도 풍부한 분이어서 아주 재미있는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화를 하는 중에 진교무님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분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마음을 수련하는 일’과 성경이 말하는 ‘말씀을 마음에 두는 일’의 차이에 대해서였습니다. 물론 종교 논쟁을 하기 위해 만난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분위기가 심각해 지지는 않았지만 그 차이는 매우 중요하고도 본질적입니다. 마음 수련은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자기 스스로가 통찰하고 다스리는 것을 그 목표로 합니다. 출발이 자신이요 결론도 자신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자신의 의지로 바라보고 자기 안에 있는 초월적인 자아와의 만남을 그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진정한 자아를 만나는 자리가 마음 수련에서 말하는 ‘마음’의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는 것’은 이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왜 다를 수 밖에 없습니까?
성경은 마음을 하나님이 말씀으로 임재하시는 처소가 된다고 말합니다. 성경의 곳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새기라고 명령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때 우리는 마음의 중요한 기능 한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임하시는 곳인 마음은 반면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온갖 생각과 욕심과 감성이 있는 존재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바로 그 마음의 자리는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이 만나는 자리이며 교제하게 자리가 됩니다. 고린도후서 1장 22절에서 바울은 “저가 또 우리에게 인 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 대한 주권을 확인하시고 우리에 대하여 인치시되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심으로 보증하셨다는 것입니다. 과연 어떤 보증이며 그 목적은 무엇일까요? 갈라디아서 4장 6절 말씀을 봅시다.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즉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시고 그 증거로 우리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영을 보내셨습니다. 감히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것, 그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것, 창조주 되신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사귈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 영을 우리에게 보내주셨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존재하기 때문이요, 우리가 그 아들의 영을 힘 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영을 우리의 마음에 허락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창조주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원불교의 진교무님이 주장했던 ‘마음 수련’과 우리가 고백하는 말씀과 교제의 처소로서의 마음과의 분명한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원불교 뿐 아니라 ‘선(禪)’의 개념을 가진 모든 동양 종교의 마음 수련은 자신의 내면과의 대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우리의 영이 그 말씀 앞에서 새롭게 되며 하나님의 영과 교제하는 귀한 자리입니다. 마음 수련의 주체는 자신이요, 주인도 자신이라면 성도로서의 우리의 마음의 주인은 하나님이요 말씀으로 임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만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성도의 마음은 ‘생명의 근원’이 되어 세상에 그 생명을 공급하는 마르지 않는 샘이 되는 것입니다.
진교무님과는 정기적으로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 분의 잘 정리된 듯 보이는 마음이 편하게 보였습니다. 만남의 끝에 그분의 정돈된 마음에 복음을 심을 수 있기를 바라며 다음 만남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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