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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란트, 외면할 수 있을까? 이응도 목사 2011-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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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란트, 외면할 수 있을까?

한국의 T.V. 프로그램 중에 꼭 만나보고 싶은 친구나 은사, 첫사랑을 찾아주는 한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아마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이름일 것입니다. 그 프로그램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한번쯤은 ‘내가 저 프로그램에 나간다면 나는 누구를 찾을까?’를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이던 ‘이** 선생님’을 그 누구보다도 만나고 싶었습니다. 내 신앙도 바르게 잘 지도해 주셨고, 무엇보다 잘못되기 쉬웠던 내 고등학교 생활의 든든한 회초리가 되셨던 분이십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잘 찾아 뵙지 않다 보니 과연 내 이름을 기억하고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꼭 한번 만나서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국에서 고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는 친구의 도움으로 그 선생님과 연결이 되었습니다. 부산의 한 고등학교에서 여전히 수학을 가르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메일을 먼저 띄워 보냈습니다. 

‘저는 이응도 입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고등학교 때 장래 희망난에 목사가 되겠다고 적었었는데, 선생님께서 너 정말 목사가 될거냐고 물어보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20년이 지난 지금 정말 목사가 되어서 미국으로 건너와 상담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늘 잊지 않고 있습니다. 참 감사합니다…’


뭐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대하지 않았던 답장이 다음날 바로 도착했습니다.


‘이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저 이**입니다.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목사님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다시 답장을 보내드렸습니다.


‘선생님, 너무 황송합니다. 말씀을 낮추시고 편하게 대해 주시면 자주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동창 몇몇의 소식도 함께 전해 드렸습니다. 그 다음날 다시 답장이 왔습니다. 나는 그 답장 이후로 다음에 찾아 뵙겠다는 짧은 인사 외에 다른 메일을 보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 답장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목사님께 하대할 수 없습니다. 저도 제가 목사님을 만났던 고등학교 시절, 목회자를 꿈꾸는 소년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서원했습니다. 그것이 나의 달란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고 가정 형편으로 직장을 다닐 수 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점점 나의 소명은 희미해져 갔습니다. 나처럼 젊었을 때 가졌던 꿈을 묻어두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 역시 그들 중 한 사람이 되어 그 꿈을 추억의 한 페이지에 접어두고, 오늘의 필요를 따라 그저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이메일 한 통은 제게 있어서 큰 충격이었습니다. 내가 걸어야 할 길을 걷고 있는 목사님께 감사와 존경을 보냅니다. 하시는 목회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늘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이** 선생님은 촌지를 받지 않으시는 몇 안되는 선생님 중 한 분이셨습니다. 나는 이** 선생님에게 꼭 한번 뺨을 맞은 적이 있는데, 그 한번이 약이 되고, 두고두고 선생님께 감사할 수 있는 매가 되었습니다. 같이 근무하시는 다른 선생님들도 ‘너희 담임 **환 선생님을 존경한다’고 말할 만큼 매사에 빈틈이 없으시고 자기 관리에 철저하시고 신앙 생활에 열심 있는 분이셨습니다. 나는 적어도 그 선생님이 성공하는 삶을 살았다는데 대해서 조금의 의심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좋은 교사로 모든 사람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던 그 선생님은 뜻 밖에 자신만이 아는 소명에 대한 깊은 아픔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선생님의 달란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선생님은 과연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묻어두고 있습니까? 외면하고 있습니까?


나는 내가 존경하는 그 선생님에게 두가지 문제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정말 그가 하나님 앞에서 받은 소명이 목회자일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입니다. 그가 현실적인 삶의 필요에 하루 하루 충실하다 보니 그 소명을 잊고 살 수 밖에 없었을 가능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또 하나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사명이 교사로서 나와 또 다른 많은 친구들과 같은 제자들을 양육하는데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가능성은 그 선생님의 삶에 좀더 깊은 문제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능하고 잘 헌신된 기독교인으로 평생을 살아왔지만 정작 자신이 하나님께 각기 다른 은사대로 받은 그 달란트가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작 하나님이 그 신실하신 뜻 가운데 자신의 삶을 제자들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늘 그 일에서 상실감과 패배감을 맛보며 살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선생님의 삶을 그대로 좋습니까? 그렇게 살아도 되는 것입니까? 아마 나의 이야기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 많은 분들이 “다들 그렇게 살고 있지 않나…?”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정확한 소명의식과 전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라고 말하는 분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런 생각 뒷 편에 아주 심각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가슴이 아프지만 조심스럽게 나의 은사에 대한 말씀을 여러분에게 드렸습니다. 나이 60을 바라보면서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고 대부분의 제자들과 동료로부터 존경을 받는 참으로 신실하고 유능한 크리스찬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 드렸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보든지,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든지 스스로에 대해 불만족하고, 실패했다고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달란트를 잘못 알고 있었든지, 혹은 자신의 달란트를 땅에다 묻어두고 다른 사람이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평생을 바쳐서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나에게 그렇게 선한 영향을 미쳤고, 오늘 목회자가 되도록 도와주셨던 그 선생님이 받은 달란트는 무엇일까요? 그는 달란트를 애써 외면하고 살고 있는 것일까요? 그는 달란트를 땅에다 묻어두고 있는 것일까요? 그는 아직도 자신의 달란트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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