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용기다.
경남 진주에서 교역자로 한 교회를 섬기던 시절, 제가 맡은 구역에 한 가족이 새로 등록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도 뭔가 불안해 보이고 교회 출석하는 일에 대한 부담과 두려움이 있는 듯했습니다. 그 가족이 교회 출석한 지 3-4개월이 지난 어느 주일, 아이들만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에는 아이들도 교회에 나오지를 않기 시작했습니다. 권사님 한 분을 모시고 그 가정을 방문했습니다. 이전에도 심방하는 것을 극구 사양했던 집이었습니다. 권사님과 제가 집에 들어서자 부부는 놀라면서도 안절부절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루에 그 분들을 앉히고 저희들도 앉았습니다. 차분히 안정시킨 후 물어보았습니다.
“좋지 않은 일이 있으십니까? 뭔가 좋지 않아 보입니다.”
그분들은 오랫동안 신주단지를 모시고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수 많은 제사와 의식들이 너무 부담스럽고 싫어서 부부가 의논하여 교회에 출석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문중에서 알아버렸습니다. 문중 회의를 했답니다. 그리고는 아주 강력한 경고를 했습니다. 한 문중에 두 신이 있을 수 없고 너희들이 교회를 선택하려면 문중을 떠나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섬기던 신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려고 시도했던 사람들이 당했던 재앙에 대해서 절절히 설명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통 사고로, 또 어떤 사람은 병으로, 어떤 사람은 자녀가, 또 어떤 사람은 남편이나 아내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문중에서 섬기는 신은 자신만을 섬기고 정성을 다하면 온 문중에 큰 복을 주지만 다른 신을 섬기려 하면 재앙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경고하기를 그 가족 외에 다른 사람에게 재앙이 내릴 수도 있는데 그 때에는 반드시 그 가족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부는 제가 자기 집의 마루에 앉아 있는 것조차도 부담스러워했습니다. 두 눈에 가득 차 있는 두려움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 분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신주단지가 어디에 있습니까? 저는 아직 한번도 그것을 못 보았는데 한번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그 분들은 말 없이 손가락을 가리켰습니다. 마루 한편 높은 곳 선반 위에 크지 않은 항아리가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저는 일어나 그 항아리로 다가섰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한번 만져봐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부부는 떨리는 눈빛으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항아리를 내려서 마루에 놓았습니다. 노란 종이에 빨간 글씨 같은 것을 갈겨 쓴 부적이 붙어 있었고, 숟가락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선생님, 이제 김선생님을 두렵게 하는 그 신주단지입니까?”
그렇다고 했습니다.
“선생님, 이것이 김선생님을 해칠 수 있습니까?”
그렇다고 했습니다.
“김선생님, 그렇다면 제가 이것을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놀라서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김선생님, 만일 이것이 정말 큰 힘을 가졌다면 제가 이것에 대해서 불경스럽게 대하면 저는 큰 재앙을 당하겠군요.”
가만히 있었습니다.
“김선생님, 저는 이런 일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하지만 김선생님에게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저는 권사님과 함께 두 분을 모시고 대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대문 저편에 있던 쓰레기통에 신주 단지 안에 있던 쌀을 털어버리고 항아리를 깨 버렸습니다. 부부는 그저 멍하니 보고만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말했습니다.
“두려워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이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권사님과 저는 그 분들을 모시고 방으로 들어가서 함께 기도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가족은 곧 다시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고, 물론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예쁘게 잘 자라주었고 기울었던 남편의 사업까지 잘되기 시작했었습니다. 비록 교회에 좋지 않은 일이 있어서 얼마 지나서 다른 교회로 옮기기는 했지만 제가 유학을 오기까지 그분들은 주님 안에서 복된 가정으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지나고 생각해 보면 그때 그 가정이 예수를 제대로 믿기 위해 가장 필요했던 것은 ‘용기’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반대로 사탄이 그 가정을 자신의 소유로 붙들기 위해 가장 필요했던 것은 ‘두려움’이 아닐까요? 사탄은 온갖 두려움으로 그들의 마음을 옭아매고 예수님께 가까이 나가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즘 또 하나 마음 속에 남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 때 그 가정이 예수를 믿기 위해 용기가 필요했다면 오늘 제가 예수를 제대로 믿기 위해서는 더 많은 용기와 더 굳은 담대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유혹 많고 시험 많고 위협 많은 이 세상에서 참된 용기를 가진 성도로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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