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 밖의 길
얼마 전 주기철 목사님의 전기를 읽으면서 정말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주 목사님을 설득하던 일본 경찰은 1938년 가을, 제 37회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 참배를 가결한 후 주 목사님에게 좀더 생각할 기회를 주겠다는 명목으로 석방했습니다. 그것은 감옥에서 너무 고집스럽게 자기 생각과 신앙만 지키려 하지 말고 나가서 다른 목회자들이 어떻게 적당히 타협했는지를 보면서 생각을 바꾸라는 뜻이 숨어 있었습니다.
뜻밖에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자 오정모 사모님은 황급히 남편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물은 말은 “승리요?”라는 말이었습니다. 주목사님의 몸의 상처나 감옥에서의 고생을 묻기보다 가장 먼저 “과연 신앙을 지켜냈는가?”를 물은 것입니다. 주목사님이 미소를 지으니 비로서 사모님은 다가 앉으며 “끝까지 싸우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주목사님의 영광된 순교의 절반은 오정모 사모의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도대체 두 사람은 왜 그런 어려운 길을 스스로 택해서 걸어갔을까요? 이후 주변에서 목회를 하는 목사님들과 산정현 교회 장로님들이 앉은 자리에서 주목사님은 이런 말을 합니다. “그들의 악착 같은 채찍은 살을 찢고 신경에 불을 지르지요. 아픈 것이 그렇게 심하고 무섭다는 체험을 말로 표현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그 정도는 시작일 뿐이지요. 앞으로 어떠한 더 심한 고문이 올지…. 그렇지만 각오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당하신 그것을 당하는 것이니 힘에 지나치게 어려워도 당해야겠지요.” 주목사님에게 있어서 고난을 넉넉하게 이길 수 있는 힘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는 고난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가 고난 중에 만난 예수님은 그에게 그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기쁨과 감사를 주신 것입니다.
그의 이런 신앙은 한국 교회 성도들이 많은 은혜를 받고 있는 ‘영문 밖의 길’이라는 찬양에서 잘 나타납니다. 이 찬양에서 주님의 고난의 자취를 따라 살고자 하는 주목사님의 각오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서쪽 하늘 붉은 노을 영문 밖에 비치누나 / 연약하온 두 어깨에 십자가를 생각하니
머리에는 가시관 몸에는 붉은 옷 / 힘 없이 걸어가신 영문 밖의 길이라네
눈물 없이 못 가는 길 피 없이 못 가는 길 / 영문 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영생복락 얻으려면 이 길만을 걸어야 해 / 배고파도 올라가고 죽더라도 올라가세
십자가의 고개턱이 제 아무리 어려워도 / 주님 가신 길이오니 내가 어찌 못 가오리
주님 제자 베드로는 거꾸로도 갔사오니 / 고생이라 못 가오며 죽음이라 못 가오리
주목사님은 자신의 삶에 찾아온 고난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철저하게 연관시키고 있습니다.그는 자신의 삶을 이미 예수 안에서, 십자가를 통해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을 통해서 십자가를 볼 수 있는 사람, 자기 안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어쩌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이 땅에 살면서 하늘을 체험하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삶 속에 숨어 있는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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