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 | 이응도 목사 | 2012-08-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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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 하지만 제가 영문학을 전공한 것이 전혀 표시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그 표시를 좀 내려고 합니다. 영국 소설 중에서 18세기 말에 발표되어 지금까지 사랑 받고 있는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제인 오스틴(Jane Austin)이라는 여류 작가가 21세에 ‘첫인상’이라는 제목으로 이 소설을 썼고, 15년이 지난 후 지금의 제목인 ‘오만과 편견’으로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여성의 입장에서 풀어 쓴 연애 소설이기 때문에 벌써 4차례 영화로 만들어졌고, 많은 사랑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소설에는 두 주인공이 있습니다. ‘다아시’라는 모든 것을 갖춘 한 총각과 ‘엘리자베스’라는 그리 대단할 것 없는 평범한 조건을 가진 한 처녀가 그들입니다. 그들이 만나고 서로 사랑을 이루는 과정에 있어서 가장 큰 방해가 되는 것은 연적(戀敵)도 아니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조건도 아니고, 집안의 반대도 아니었습니다. 제인 오스틴은 모든 것을 가진 남성 다아시의 ‘오만함’(Pride)과 오만한 남자에 대한 엘리자베스의 ‘편견’(Rrejudice)에 주목합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 안에 있는, 서로를 만나기 전에 형성된 ‘오만과 편견’이라는 품성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게 되고 서로를 이해하지도 용납하지도 못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갑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게 되고, 서로에게 있던 오만함과 편견을 제거합니다. 오만과 편견 없이 서로를 만날 수 있게 된 그들은 조건과 환경을 뛰어넘는 사랑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 소설이 오랫동안 사랑을 받게 된 이유는 이야기 자체가 설득력 있고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영국은 산업 자본주의의 성장과 더불어서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문화에 민감했습니다. 엄연히 신분의 차이, 즉 귀족과 새로운 신분인 중산층과 평민과 하인의 차이가 존재하고 있었지만, 새로운 시대에는 그 모든 차이를 넘어서서 사람과 사람의 참된 만남이 성공할 수 있다는 줄거리는 또 하나의 신데렐라 이야기로 충분히 사랑 받을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이 소설은 오늘날 다양한 버전으로 영화로 만들어졌는데요, 자본주의 사회 속에 존재하는 ‘소유의 차이’로부터 오는 ‘오만과 편견’을 지적하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소통과 만남을 주제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성도와 하나님과의 만남에도 이런 잘못된 이해와 해석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에 대한 오만과 상대방에 대한 편견으로 서로의 사랑을 이루지 못했던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편견과 자신에 대한 오해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회복하고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는데 큰 장애가 됩니다. 갈라디아서 4:9절에는 사도 바울의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안타까운 마음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갈 4:9)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가 이미 ‘하나님을 안다’고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아신 바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세상의 초등학문에 다시 종노릇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에 대해 갈라디아 교회에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아닌 유대주의적인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이 교회에 찾아오게 되고 많은 성도들이 미혹 당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을 안타깝게 책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왜 잘못된 가르침에 삶을 빼앗기는가!” 그렇습니다. 1세기 초대교회 뿐만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고 믿는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있고, 나아가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과 교회 사이에 놓인 ‘오만과 편견’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교만함이 하나님과의 교통을 가로막고,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돌아가야 하고, 말씀을 통해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우고 만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생각 속에서 나를 알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능력이 극대화됩니다. 지식과 문명은 사람을 더욱 교만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해석하고 분석하려는 시도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욱 말씀에 집중합니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응도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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