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uch할까요?” | 이응도 목사 | 2012-10-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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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ch할까요?” 지난 주에 한 가정과 상담을 했습니다. 많은 상처와 아픔 속에서 만났고, 여전히 그 상처가 관계와 삶 속에서 문제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상처를 해결하지 못해서 배우자에게 도움을 기대하고 있지만, 만족되지 않는 기대와 거절감으로 상대방의 상처를 계속 공격하고 서로를 더 아프게, 더 비참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두 분에게 물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하기를 원하세요?” 두 분의 대답은 같았습니다.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서로 사랑하며 살고 싶어요.” 다시 제가 물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원하시는 행복과 사랑을 위해서 지금 당장 무슨 일부터 하면 될까요?” 두 분은 머뭇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2004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크래쉬(Crash)’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LA라는 거대도시에서 살고 있는 몇 사람들의 얽힌 삶에 주목합니다. 그들은 모두 살아남기 위해 자신만의 방법을 선택하고 질주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삶의 방법을 상징하고 있는 것은 자동차입니다. 자동차는 주인공들이 살고 있는 그들만의 공간이면서 생존에 필요한 도구이기도 합니다. 주인공들은 이 ‘유리와 금속으로 만든 공간’ 안에서 자신을 보호하며 다른 사람을 공격 합니다. 이 속에 있을 때 모든 주인공들은 서로에 대해 Crash(충돌)합니다. 서로를 이해하거나 자신을 이해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충돌하여 무너뜨리거나 자신이 무너집니다. 그러나 그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충돌’(crash)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서로에게 절박하게 외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충돌(crash)이 아니라, 위로(touch)예요. 나를 만져주고 위로해주고 사랑해주세요.” 왜 그들은 그토록 원하는 touch가 아닌 서로를 상하게 하고 절망하게 하는 crash를 선택하게 되는 것일까요? 왜 제가 만난 부부는 서로가 그렇게 간절하게 원하는 사랑과 행복이 아닌 상처와 고통을 선택하는 것일까요? 이것이 제가 상담을 계속하면서 가지는 의문이면서 그 영화에서 제기하는 문제입니다. 이 영화에는 숨겨진 메시지가 하나 있습니다. 영화의 모든 주인공은 서로 깊은 연관성 속에 있고, 모든 사건 또한 그렇습니다. 모든 주인공이 단단하고 차가운 자동차 안에 자신을 숨기고 있지만 알고 보니 그들은 가족이고 형제입니다. 영화 속에 발생하는 모든 사건은 오직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서로 아무런 관련성이 없는 사건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모든 사건은 원인과 결과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영화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은 서로 연관되어 있는 거야. 내가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면 내가 아픈 거야. 내가 다른 사람을 위로하면 너도 위로를 받을 거야. 사랑받고 싶니? 그러면 먼저 다른 사람을 안아 줘야해. 너를 보호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하면 너는 더 깊은 상처를 입게 될거야. 왜냐하면 나는 곧 우리이고, 우리는 곧 너니까..... 그래, 이제 잘 생각해봐. 이 복잡한 세상에 살면서 보다 행복하기 위해 너는 무엇을 할거니? crash 할거니? touch 할거니?” 만일 그 영화에 나오는 모든 주인공이 이 메시지를 먼저 마음에 두고 있었다면 crash라는 전략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결국 내가 충돌하고 상하게 하는 대상이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더니 내 안에는 더 깊은 상처가 자라게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공격하지 않으면 공격을 당할까 하는 염려와 두려움이 서로를 더욱 공격하게 하고, 나의 사랑과 위로에 대한 간절한 외침을 들어주지 않고 있다는 분노가 서로에 대해 더 날카롭고 더 차가운 마음을 품게 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영화에서 주는 메시지를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Touch할까요? 만져줄까요? 위로해 줄까요? 당신의 마음을..... 당신의 아픔을.....” 저는 지난 주 제가 만난 가정에 같은 내용으로 이야기했습니다. 두 분에게 필요한 것은 두려움과 염려가 아닌 서로에 대한 믿음입니다. 분노와 경직된 마음이 아닌 부드럽고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거절된 기대감으로 서로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이 사랑과 위로라는 것 표현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있는 상처로 마음과 말을 날카롭게 다듬어서 서로를 공격하려 하지 말고, 내 아픔으로 상대방을 이해함으로 서로를 부드럽게 Touch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은 곧 나를 공격하는 것이요, 상대방이 고통으로 쓰러질 때 내 가정과 삶이 함께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충돌하며 무너뜨리시겠습니까? 서로를 가슴으로 안고 사랑하고 위로하시겠습니까? 이응도 목사 / 필라델피아 초대교회, 가정 상담 연구원 215-869-5703, edwinlee@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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