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연약함에 공감(共感)하시는 주님 | 이응도 목사 | 2012-11-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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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약함에 공감(共感)하시는 주님 인생이 경험할 수 있는 슬픔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버려짐’ 혹은 ‘잊혀짐’일 것입니다. 수많은 문학 작품과 노래가 이것을 주제로 만들어졌고, 여전히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버려질까, 잊혀질까 두려워하고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것은 우리들의 삶의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성경 또한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며 하나님은 나를 잊으셨는지, 나를 절망 가운데 버리셨는지를 물었습니다. 이 험하고 악한 세상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고 잊혀진 인생만큼 슬프고 절망적인 인생은 없다는 것이 공통된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편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던지시는 질문도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가 어찌 나를 잊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과 그 은혜를 잊은 패역한 백성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찬을 통해 우리들을 위해 흘리신 피와 찢으신 살을 늘 기억하라고 당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한꺼번에 완전히 버림을 받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모든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처절하게 배신당하고, 손가락질과 침 뱉음을 당하고, 채찍질과 발길질을 당하고, 마지막에는 아무도 함께 누울 수 없는 십자가 위에서 그 누구의 손도 잡을 수 없도록 못 박혀서 절망 가운데 죽어간 사람은 누구일까요? 하나님의 뜻으로 이 세상에 왔는데, 그 뜻의 마지막은 ‘완전한 버림받음’이어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룬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 분은 바로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를 처절하게 외치고 절망 가운데 숨을 거두신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제게는 이 장면이 다소 당황스러웠습니다. 적어도 예수님이라면, 하나님께서 보내심에 대한 확신 가운데 이 땅에 오셨고, 메시야로서의 자신에 대한 믿음에 충만하셨을 예수님이라면 이런 정도의 절망을 극복하실 수 있지 않았을까요? 저는 예수님의 절망이 이해되지 않아서 고민했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하나님을 원망하셨을까? 왜 예수님은 당당하게 ‘죽임 당함’을 인정하지 않으셨을까? 왜 예수님은 이렇게 연약한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이셨을까?‘ 하지만 주님의 연약한 모습 앞에서 마음 한편에는 은근히 안심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 때문입니다. ‘아... 예수님도 나와 같이 절망하시는구나... 예수님도 나와 같이 두려워하시는구나... 예수님도 나처럼 아파하시고 버림받기 싫으시고 고독하시구나.... 예수님도 십자가를 정말 벗어나고 싶으셨겠구나.... 이 치욕의 인생에서 훌쩍 뛰어내려 조롱하는 모든 무리들을 벌하시고 싶었겠구나.... 예수님도 하나님을 원망할만큼 고통과 외로움에 몸부림치셨구나....’ 그리고 또 마음 한 구석을 스며드는 위로도 있습니다. ‘그래, 예수님은 나의 불안함을 이해하시겠구나... 나의 연약함과 비겁함을 받아주시겠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인 나와 공감(共感)하고 계시는구나.... 내 눈물과 아픔과 고통에 대해 고개 끄덕여주시고 안아주시겠구나.....’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 중 하나가 되셨고,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고통에 대해 공감(共感)하시는 분입니다. 주님도 우리처럼 연약하셨고, 주님도 우리처럼 고통스러워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와 공감하시는 주님, 나를 더욱 사랑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로 자신에 대해 실망하고 때로 하나님에 대해 원망하는 우리들,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며 공감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보다 연약한 모습으로 우리를 더욱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을 더욱 의지합니다. 주님은 나와 함께 하십니다. 이응도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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