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칼럼

  • 홈 >
  • 예배와 말씀 >
  • 목회 칼럼
목회 칼럼
“누군가 나를 위해 가장 밑바닥에 있습니다.” 이응도 목사 2013-08-08
  • 추천 0
  • 댓글 0
  • 조회 323

http://chodaepa.onmam.com/bbs/bbsView/14/544540

  “누군가 나를 위해 가장 밑바닥에 있습니다.”

  

‘희망으로’라는 아이디를 쓰는,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전신의 근육이 무력해져가는 병을 앓고 있는 아내를 간호하고 있고, 중학생 딸을 여러 성도들의 도움을 통해서 돌보고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과 사랑, 신뢰와 책임을 포기하지 않으려 애쓰는 중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소개하고 싶습니다. ‘누군가 가장 밑바닥에 있다...’는 제목의 글입니다.

  

밤 11시 넘은 시간 / 부시럭 거리는 소리에 이어 우당탕 저벅저벅, / 누가 이 시간에 잠 안자고 남들을 괴롭힐까? 앞쪽 환자가 간병인의 부축을 받아 휠체어를 타고 / 화장실을 가는 것 같다. '어쩔수 없지... 생리대사를,'

  

그런데 끝이 아니다. / 잠들만 하면 밤1시 새벽 3시... / 간신히 조용할만하면 또 6시에 간호사 혈당체크 인슐린주사, / 밥먹다 시끌벅적 웅성웅성 소리가 들린다. / 병실로 들어서면서 잔뜩 화가난 목소리

  

'밖에 나가지마! 샤워실에서 복도로 변이 줄줄 흘려있어!'

  

누군가 급해졌는데 발걸음이 느려 변기에 도착도 하기 전에 / 바지로 주룩 새었나보다. / 뇌경색으로 입원한 옆 옆방 아저씨... / 벌써 몇 번째이다. / 이러고도 살아야하나? / 돌보는 이 없으면 단 한 달도 못살지 모르는데, / 무엇을 할 수 있고 세상에 무엇을 돌려줄 수 있을까? / '........' / 누가 대답을 해줄수 있을까?

  

그런데, / 소용 여부로 살고 죽어야 한다면 / 아무도 죽는 걸 말릴 이유도 없고, / 그것이 죄도 되지 않을 것이다. / 굳이 약자를 돌보라는 명령과 /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신다는 약속은 왜 필요할까? / 무언가 그래서는 안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병원에 있는 사람들만 약자이고 / 소용이 없이 남을 괴롭히기만 하는 사람들일까? / 정말 그럴까? / 그럼 병원생활 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가? / 직장에서 학교에서, 혹은 가정에서조차 / 열등감과 약자로 몰려서 / 한없이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고통에는 일렬이 없다. / 위 아래가 없다. / 그래서 나의 고통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다고 느끼지만 / 그렇게 말해선 안된다. / 나는 아내보다 덜 힘들고, / 누군가는 나보다 덜 힘들다. / 그건 심정의 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 누가 누구를 도와줄 정도를 기준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어려움이, 고난이 세상에서 가장 무겁다고 / 말하지 말일이다. / 누군가를 도와줄 힘만 있거나, / 나의 도움조차 필요한 사람만 있다면...

  

궁금하다. / 내 아래 깔린 아내보다 더 힘든 사람은 누구일까? / 예전에 지나온 병원들을 떠올리니 있었다. / 그럼 그 사람보다 더 아래는?

  

아! 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아래, / 가장 깊은 바닥에 있는 그 누구! / 가장 바닥에 몰릴만한 자기 잘못도 없고, / 그걸 벗어날만한 힘도 있고 빽도 있는데도 / 고스란히 치욕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며 찍소리도 안하고 / 마침내 죽음까지 당한 사람, - 예수...

  

그 바닥을 딛고 그 위에 한 사람이 있고, / 또 그 위에 조금 덜한 한 사람이 있고, / 그렇게 우리는 모두 세상을 떠나야할 자격은 없어졌다. / 밉고 화나다가도 / 거동도 못하는 사람을 인정하기로 했다. / 저 사람의 도움조차 받아야 할 더 어려운 사람도 있는데 / 살아야하고말고! / 하긴 내 아내도 별 만만치 않으니.....




올 한해를 어떻게 보내고 계십니까? 즐겁고 의미 있었습니까? 슬프고 힘들었습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한 해를 돌아보면서 위에 소개드린 글과 사람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김재식씨는 아내의 고통을 보면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더 아래, 그보다 더 깊은 곳에 고통당하고 있음을 보고 있기 때문이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경험하는 고통보다 낮은 곳에 아내가 있고, 아내보다 더 깊은 고통을 경험하는 다른 환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다 더 깊이, 더 깊이 아래, 또 아래에서 그가 만난 것은 예수님입니다. 그는 자기보다 낮은 곳에, 깊은 곳에서 신음하는 사람들, 가장 깊은 곳에 십자가를 세우신 예수님을 보면서 자신의 고통을 어루만집니다. 그들보다 더 높은 만큼 그들보다 더 감사드리기로 결정합니다. 자신과 예수 사이에서 발견하는 고통의 차이만큼 그는 오히려 고난 가운데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사랑사랑하기 때문에 나보다 낮은 곳에서 나의 고통을 책임지는 분이 있다는 사실, 오늘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복음입니다. 그 복음을 마음에 품고 다시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평생에 그 복음이 우리와 함께 있고, 그 복음의 주인되신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 되실 것입니다.

  

이응도 목사 / 필라델피아 초대교회, 가정 상담 연구원

215-869-5703,
edwinlee@naver.com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눈물병에 담으소서” 이응도 목사 2013.08.08 0 558
다음글 “누구나 어느 한 쪽이 문드러진 채로 살아간다.” 이응도 목사 2013.08.08 0 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