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성도 보통씨와 들장미 소녀 캔디 | na kim | 2018-08-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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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 보통씨와 들장미 소녀 캔디 지난 6월 말에 우리 교단 같은 노회 소속 목회자들의 가족 수양회가 가까운 포코노에서 열렸습니다. 이민 교회를 섬기면서 힘들고 고단했던 마음과 몸을 풀어놓은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첫째 날 저녁에 가족 장기자랑을 했었습니다. 메릴랜드에서 목회를 하는 한 사모님이 앞에 섰습니다. 주삣주삣... 한참을 망설이던 사모님은 갑자기 씩씩하게... 그러나 두 손으로 마이크를 꽉 잡고 눈을 질끈 감고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노래의 제목은 ‘들장미 소녀 캔디’였습니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울어 /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기 왜 울어 웃으면서 달려보자 푸른 들을 / 푸른 하늘 바라보며 노래하자 내 이름은 내 이름은 내 이름은 캔디 / 나 혼자 있으면 어쩐지 쓸쓸해지지만 이럴 땐 얘기를 나누자 거울 속의 나 하고 / 웃어라 웃어라 웃어라 캔디야 울~면 바보다 캔디 캔디야 처음에는 웃었습니다. 50이 넘은 곱고 고상한 분위기의 사모님이었는데... 팝송이나 가곡 정도는 기대했는데 ‘들장미 소녀 캔디’라니요... 재미있게 하려는 의도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모두 곧 심각해졌습니다. 사모님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물어보니 그 노래는 사모님의 ‘인생노래’라고 했습니다. 그 힘든 마음이 충분히 짐작되었습니다. 미국으로 오기 전 진주에 있는 한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3년 간 섬겼습니다. 마음이 맞는 성도들과 함께 경남 고성에 있는 ‘애육원’의 고아원 후원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일 년에 두 번씩 전 회원이 다 함께 가서 큰 파티를 열었습니다. 이발을 하는 회원은 이발을 해주었고 여자 집사님들은 직접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가기도 했고 목욕을 시켜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과 친해지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마음 문을 쉽게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매달 방문이 반복되고 일 년에 두 번 이상의 파티를 하면서 조금씩 친해졌습니다. ‘선희’(가명)라는 아이가 있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키는 아주 작았습니다. 공부를 잘하고 똑똑했고, 사랑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아이였습니다. 고아원에 들어온 아이들은 나름대로의 사연들이 있습니다. 선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부모님이 살아계셨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부부관계가 좋지를 못해서 결국 선희를 고아원에 맡겼습니다. 선희가 기억하는 부모와 함께 했던 어린 시절은 술과 폭력, 다툼과 욕설이었습니다. 그래도 선희는 엄마, 아빠가 언젠가 다시 결합해서 자신을 데리러 올 것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자신이 공부 잘하고 착하게 잘 성장하면 부모가 결국 자신을 다시 찾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선희가 가장 마음 아프게 했던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선희는 울지 않는 아이였습니다. 자신이 울거나 귀찮게 하면 사람들이 자신을 외면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엄마 아빠가 자신을 버린 이유가 자신이 작고 못났고 그리고 울면서 보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늘 웃는 이유 또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귀찮게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일을 하기 싫은지에 대해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고 늘 다른 사람의 생각과 기준에 맞춰서 행동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선희가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마음 아플 때 울지 못하고 원하는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선희의 마음에는 점점 깊은 곳에 상처가 숨어들고 있었습니다. 그 상처를 드러내지 않으면 치유될 수 없는데도 혹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할까봐 ‘울지 않는 아이’, ‘요구하지 않는 아이’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바디메오’라는 한 소경이 등장합니다. 그는 실은 이름이 없습니다. 바디메오의 뜻은 ‘디메오의 아들’입니다. 어쩌면 그는 나면서부터 죄책감을 안고 살았을 것입니다. 부모의 기쁨이 되지 못하고 자랑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누구의 죄로 소경으로 태어났을까...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저주 받은 인생, 성 밖으로 쫓겨나서 거지로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 시작된 불행과 고통에 대해 슬퍼하고 분노하기보다 절망하면서 울음을 삼킬 수밖에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를 만납니다. 그리고 소리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동안 예수님이 여리고성에 왔다는 것을 들었지만 찾아갈 수 없었던 그는 성문에서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를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소리쳤습니다. “예수님, 내 고통을 한번 돌아봐 주시겠습니까? 제발 나를 한번만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사람들이 동전을 던지며 그를 말립니다. 하지만 그는 계속 소리칩니다. 웁니다. 울부짖습니다. 예수님께 그의 울음이 전달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울지 않는 소녀, 들장미와 같은 소녀 캔디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울어도 됩니다. 사랑을 요청해도 됩니다. 사랑을 받은 자녀가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울지 않는 캔디가 아닌 울부짖는 바디메오가 하나님을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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