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성도 보통씨는 화해할 수 있을까? | na kim | 2018-09-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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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 보통씨는 화해할 수 있을까? 12 지난 봄에 Arkansas의 주도인 Little Rock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아주 인상적인 경험을 했습니다. Little Rock Central High School을 방문하고, 그 학교에 얽힌 미국 역사의 한 장면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Little Rock Nine'이라고 불리는 사건입니다. 위키 백과에는 이 사건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The Little Rock Nine was a group of nine African American students enrolled in Little Rock Central High School in 1957.”(‘리틀 락9’은 1957년 리틀락 중앙고등학교에 등교하기 시작한 9명의 흑인 학생들을 일컫는 말이다.) ‘리틀락의 위기'(Little Rock Crisis)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은 미국 인종차별 역사에 한 획을 긋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952년 전미 유색인종 협회(NAACP)는 대법원에 인종차별로 인한 흑인과 백인의 학교분리현상에 대해 소송을 제기합니다. 1954년 미 대법원으로부터 위헌 판결을 얻어냅니다. 그리고 1957년, 전미 유색인종 협회(NAACP)에서 우수한 성적과 태도를 기준으로 뽑은 아홉명의 흑인 학생들이 리틀락 센트럴 하이스쿨(Little Rock Central High School)에 등록합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 학교는 오직 백인들에게만 입학이 허용되었습니다. 그들의 첫 등교부터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등교를 반대하는 세력들이 많았고, 이 세력을 지지하던 아칸소 주 주지사 Orval Faubus는 주방위군을 동원해서 흑인학생들의 등교를 막았습니다. 미국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는 분노합니다. 그는 아칸소 주 주지사를 소환했고, 주방위군을 해체하여 연방군에 편입시킵니다. 또한 연방육군 101공수사단을 투입하여 아홉명의 흑인학생들의 등하교를 철저하게 보호합니다. 결국 9인의 흑인 학생들은 온갖 차별과 고난 속에서도 학업을 마쳤습니다. 이후 이 사건은 흑인 인권 운동의 대표사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여기서 조금 더 나갑니다. 먼저 사진을 보실까요? 위에 있는 사진은 한 백인 소녀가 흑인 소녀를 따라가며 소리치는 장면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사진은 조금 전에 설명드린 리틀락의 9명의 흑인 학생들이 등교하던 날 찍혔습니다. 이 사진에 등장하는 백인 여학생은 자신의 상식에 충실했습니다. 자신이 그동안 배우고 익숙한 문화를 따라 판단했습니다. 흑인은 이 학교에 들어와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확신과 증오에 찬 표정입니다. 꽤 유명한 사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7년, 40년이 지납니다. 이 두 소녀가 50대 후반의 중년이 되었습니다. 서로 만났습니다. 만나고 보니 서로가 평범하고 최선을 다해서 사는 이웃입니다. 리틀락 9명 중에 1인이었던 Elizabeth Eckford와 그녀의 등교를 소리치며 막았던 Hazel Bryan Massery는 서로 만나서 악수했고, 포옹했고, 용서했고, 화해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우리가 그렇게 다툴 일도 아니었고, 서로를 미워할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한 소녀는 자신의 인권을 생각했고, 다른 소녀는 자신이 배운 대로 행동했습니다. 그것이 당시 미국의 역사였고, 넘기 힘든 장벽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장벽에 넘어지고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 상처는 미국인들의 마음에 있고, 역사에 있고, 관계에도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렇게 부등켜안고 화해할 수 있는 일인데, 그때는 왜 그렇게 증오하고 적대했는지 모르겠다고 서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생각이 바뀌니 서로를 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쩌다보니 서로 상처를 품게 된다면.... 성도와 교회는 서로 화해할 수 있을까요? 참 힘들고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아실 겁니다. 성도들은 대부분 확신 가운데 서로를 배척합니다. 내가 믿는 믿음과 말씀에 근거해서 다투고 적대합니다. 화해가 힘든 이유는 확신이 지나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우리의 확신이란 참으로 연약하고 어이없을 때가 많습니다. 마치 리틀락의 9인에 대한 그 시대 백인들의 증오가 그 시대에는 참으로 확신 가운데 옳았지만, 지금은 어린 아이들의 상식으로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서로가 잘못 생각할 수도 있음을 인정하고, 서로의 연약함을 포용할 수 있다면 성도와 교회의 확신에 찬 적대감을 좀 쉽게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총과 칼을 들고 적대하던 리틀락의 9인에 대한 증오도 시간이 지나면 함께 웃으면서 화해할 수 있지 않았습니까? 교회와 성도는 그 어떤 문제도 넘어서서 서로를 품을 수 있는 십자가의 사랑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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