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를 움직이는 네가지 키워드 | na kim | 2018-09-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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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를 움직이는 네가지 키워드 지난 8월 말에 한국의 한 시사 방송에서 과천 은혜로 교회에 대한 내용을 방송했습니다.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교회에 속한 성도들 중에서 400여명의 성도들이 재산을 헌납하고 말세에 피난처를 찾아서 남태평양의 피지라는 섬나라로 이주했다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대규모 농장을 구입하고 집단 노동을 하면서 생활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습니다. 실상을 깨닫고 탈출한 소수의 성도들과 아직도 그곳에 생활하는 성도들의 가족들이 은혜로 교회의 실상에 대해 방송을 통해서 알렸습니다. 결국 얼마 전에 그들의 교주라고 할 수 있는 신옥주라는 여성 목회자는 외화 반출과 집단 폭행, 노동 착취 등의 혐의로 구송당했습니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닙니다. 2014년 12월에 한반도에 전쟁이 나서 절반의 국민이 죽고 기근이 들어서 어린 아이들의 인육을 먹게 된다는 주장을 하고 다녔던 홍혜선이라는 자칭 전도사가 있습니다. 많은 목사들이 이 여전도사를 따랐습니다. 성도와 교회가 흔들렸습니다. 심지어 동남아를 넘어서 미국까지 이사 온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왜 교회에는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 것일까요?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논리의 허구성을 파악할 수 있는데.... 왜 그런 사람들에게 속아서 고향도, 가족도 버리고 피난처를 찾아 떠나는 것일까요? 김요한 목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새물결 플러스’라는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좋은 책을 많이 쓰고 있는 분입니다. ‘한국 기독교를 움직이는 네 가지 키워드’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 네 가지는 ‘욕망’, ‘공포’, ‘증오’, ‘무지’입니다.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먼저 한국 기독교는 ‘욕망’에 동력화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믿고 복 받고 잘되는 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미덕입니다. 건물은 더 커야 하고 종탑은 더 높아야 하며 재정은 더 풍성해야 하고 성도는 더 많아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영성은 그래서 숫자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몇 명이나....로 그 목회와 교회의 성공 여부가 평가되고, 그 성도의 신앙 여부가 판단되며, 그 성도의 삶의 성공 또한 숫자의 크기로 재단합니다. 이미 하나님이 기준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떠난지 오래되었습니다. 말씀이 아닌 욕망이 육신이 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공포’입니다. 피지를 피난처로 삼고 떠난 ‘은혜로 교회’ 성도들이 우리와 무엇이 그리 다르겠습니까? 다만 그들은 목회자의 잘못된 가르침에 근거해서 두려움에 빠져있을 뿐입니다. 이단은 공포를 이용합니다. 심지어 집단 자살을 하는 신앙적 광기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공포 때문입니다. 권위주의적인 목회자들이 가장 잘 이용하는 무기이기도 합니다. 어떤 성도가 불행한 일을 당하면... 마치 목회자에게 순종하지 않아서 그런 것처럼 선전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빛의 하나님이시면서 위로의 하나님입니다. 사람을 공포로 다스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복음으로 사람을 협박하는 일, 참으로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세 번째는 ‘증오’입니다. 아마도 SNS 상에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만큼 적대적인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사람들이 없을 것입니다. 특히 ‘동성애’ ‘북한’ ‘이슬람’에 대해서는 타협이 없는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냅니다. 물론 저는 동성애는 싫어할 수 있고, 북한을 경계할 수 있고, 이슬람을 조심스러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이 그렇다는데 어쩌겠습니까? 다만 그것을 공적으로 주장할 때는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해서 논증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 설교 때 한번 언급했던 예멘 난민들에 대한 한국 교회와 성도들의 거부감이 좋은 예입니다. 얼마나 많은 거짓된 정보들이 SNS 상에서 퍼졌는지 모릅니다. 그들의 종교인 이슬람에 대해 경계하는 것은 얼마든지 좋습니다. 그들의 존재가 안전하지 않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여론화하기 위해서 거짓된 정보를 생산한다면 이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것은 마치 내가 어떤 사람이 싫은데... 내 싫은 감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 사람을 거짓말로 악마로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무지’입니다. 이건 좀 기분 나쁠 수 있는데요... 김요한 목사는 한국 교회가 욕망이나 공포, 혹은 증오에 동력화된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무지’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객관적이고 지성적인 성찰을 못하기 때문에 우리 시대에 어떤 신앙, 어떤 교회, 어떤 성도로 살아야 하는지 답을 찾지 못한다는 겁니다. 신옥주라는 여성이 목회자의 탈을 쓰고 성도들을 기만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참혹한 예언을 하던 홍혜선 자칭 전도사를 기존 교회들이 강사로 초대해서 부흥회를 하고 아멘아멘하면서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무지해서 그렇습니다. 때로 무지도 죄입니다.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를 설명하는 이 네 단어를 부정할 수 있는 용기가 제게는 없습니다. 다만 언젠가는 이 네 단어가 사랑과 용서, 섬김과 나눔이라는 단어로 바뀌면 좋겠습니다. 지나친 욕심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도우실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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