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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성도 보통씨가 믿는 예수 na kim 2018-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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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 보통씨가 믿는 예수

 

요즘 가끔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이제 소천하신 지 5년이 되었고, 곧 기일이 다가옵니다. 큰 아들 가일이를 대학에 보내고, 생각과 삶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제가 그 나이였을 때 아버지는 어떤 마음으로 나를 보셨을까... 생각합니다. 1985년에 대학에 들어갔고, 그때 대학가에서는 날마다 시위가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저 역시 그들 중에 한 사람이 되어 열심히 눈물과 땀을 함께 흘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가일이가 대학 2학년이 되었는데요, 제가 대학 2학년 가을에 처음으로 경찰에 잡혀갔습니다. 수사관 두 사람이 집 앞에서 1주일 동안 저를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소위 국가보안법에 의해서 반정부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불순한 조직에 가담했다는 혐의였습니다. 하필이면 토요일에 저를 잡아갔기 때문에 저는 평생 처음으로 주일예배를 빠지는 경험을 그 때 했습니다.

 

아버지 또한 야당기질이 강하셔서 그 때만해도 전두환 정권에 대해서 반감을 많이 가지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대학에 들어가서 당시에 대학가에서 유행하던 사회적인 메시지가 담긴 노래를 부르고, 시위에 참석하는 것을 막지는 않으셨습니다. 그 정도 하는 것은 대학에 들어가서 의식 있는 청년으로 사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분명히 집에 들어온 것 같은데 아침에 보니.... 이부자리 흔적만 있고 아들은 사라졌습니다. 월요일에 지도 교수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응도가 금정 경찰서에 잡혀 있으니 가서 보호자 사인을 하고 데리고 나오라고 했습니다. 아직 대학 2학년, 소위 잔챙이였기 때문에 저는 36시간 조사를 받고 보호자를 기다렸다가 월요일 오후가 되어서 경찰서를 나올 수 있었습니다.

 

80년대에는 대학에 지도교수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박정희 시대와 전두환 시대를 지나면서 학생 시위가 워낙 격화되자 각 대학 교수들에게 학생들을 진정시키는 책임을 맡겼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에 집중해야 할 교수들이 학생들을 감시하고 때로 경찰들과 협력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당시에 저의 지도교수는 최** 교수라는 분이었습니다. 아주 키가 작고 통통한 체격을 가진 분이었고,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을 하다가 얼마 전에 교수로 임용된 분이었습니다. 이 분은 자신이 학생들을 잘 감시하지 않으면 자신의 지위가 위험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자신이 지도해야 할 30명 남짓의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감시하고 보고하는 일을 했었습니다. 부산의 어느 교회 안수집사님이었습니다.

 

제가 조사를 받고 나온 후부터 지도교수님은 저희 아버지께 전화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에서 제가 한 말과 행동, 만나는 사람들을 일일이 아버지께 말씀드렸고, 학교에서는 통제가 안되니 집에서 단속하라고 권했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활동이 많아지면서 최교수님은 아버지께 응도를 학교에 못다니게 하겠다.... 아들조차 제대로 못가르치면서 어떻게 목회를 하겠는가.... 목회도 못할 수 있겠다.... 등등의 협박과 비아냥을 하기도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정말 성격이 대쪽같으신 아버지인데, 최교수님의 모든 협박을 묵묵히 받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을 잘못 키웠고, 아들 때문에 목회를망칠 수도 있다는 말.... 그런 비인격적인 협박을 받으면서도 최교수님께 고개를 숙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이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입니다. 아버지께서 불당한 일에 고개를 숙이는 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아닌 당신께서 위험에 처하는 일이라면 당당하게 맞서고 피해를 보더라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으셨을 분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아들, 아끼는 아들, 어려서부터 목회자가 되라고 기도해온 아들이 경찰에 잡혀가고 지도교수에게 미움을 받는 현실 속에서 아버지는 고개를 숙이는 선택을 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아버지와 살갑게 지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저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 것은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서 평생 지켜온 당신의 자존심마저 내려놓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내려놓은 자존심의 무게만큼 사랑은 진중한 것이고, 그 내려놓은 깊이만큼 사랑은 깊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교회와 성도에 대해 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2:5)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마음을 품고 그 마음으로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6-8절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설명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리를 내려놓으시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죽음에 내려가시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사랑의 무게와 깊이가 느껴지십니까? 사람이 자식을 위해 무릎을 꿇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권위있는 낮아짐입니다. 예수님은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 만큼 우리를 위한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간절한 사랑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 사랑을 나도 받고, 나도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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