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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술의 향기 김나래 2020-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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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술의 향기

 

이 시조를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세월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제 기억에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왔던 것 같기도 합니다. 조선 중기 인조 시대의 충신이었던 이상헌의 노래입니다. 3년 전에 영화로 보셨던 남한산성기억나십니까? 이병헌이 이조판서 최명길로, 김윤석이 예조판서 김상헌으로 나왔습니다. 1636, 중국대륙을 정복한 청나라 군대의 위세는 대단했고, 결국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갑니다. 그곳에는 약 50일 정도를 견딜 수 있는 식량만 남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산성 안에 비축된 물자는 바닥이 나고 혹한의 날씨는 계속됩니다. 신하들은 현실적으로 판단하고 청군에게 항복해서 후일을 도모하자는 주화파와 모두가 죽더라도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로 나뉘었습니다. 결국 주화파의 수장이었던 최명길이 직접 항복문서를 작성했고, 인조는 삼전도에서 왕의 옷이 아닌 하급 관리가 입는 남색 옷을 입고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합니다. 이것은 청나라 특유의 풍습으로 하급신하가 왕을 만날 때 하는 예식입니다. 한번 엎드려 절을 할 때 세 번 이마를 땅에 닿게 하는 겁니다. 3번 절을 하고 아홉 번 땅에 이마를 박아야 끝이 납니다. 남한산성에서 인조의 역할을 했던 박해일이 이 치욕적인 장면을 잘 연기했습니다.

 

결국 전쟁에 패배한 후 청과의 결사항전을 주장했던 척화파들은 모두 청나라의 수도 심양으로 끌려가서 감옥살이를 합니다. 그때 김상헌이 조국을 떠나면서 읊었다고 전해지는 시가 바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라는 시입니다. 안타깝고 비장합니다.

 

, 그렇다면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 있습니다. 명나라를 몰아내고 대륙을 정복한 청나라의 위세가 너무 강합니다. 여러분이 최명길이라면, 김상헌이라면... 혹은 무너져가는 조선의 신하라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죽기를 각오하고 끝까지 싸울까요? 이미 패배했으니 백성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항복하고 후일을 도모할까요?

 

우리 인생에는 딱히 한쪽이 옳다고 말하기에 좀 애매한 상황들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양손의 떡과 같이 어느 것을 선택해도 좋을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진퇴양난, 사면초가 같은 상황이 있습니다. 마치 최명길과 김상헌이 했던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주화가 좋을까요? 척화가 좋을까요? 영화 남한산성에서도 그 대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원작 소설을 썼던 김훈 작가도 말하기를 어느 한쪽이 옳은지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 시대가 요구하는 판단과 결정이 무엇이었는지를 고민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최명길과 김상헌, 주화파와 척사파 중에서 누가 옳았을까요? 두 사람 다 옳습니다. 그라고 두 사람 다 잘못되었습니다. 두 사람 다 새술과 새부대이며, 묵은 술과 오래된 부대입니다. 왜 둘 다 옳습니까? 역사의식을 가지고 충심을 다해 씨름했기 때문입니다. 왜 잘못되었습니까? 두 사람의 대립과 갈등이 결국 청이 아닌 명에 대한 충성 때문이었습니다. 새 부대인데 이미 낡은 것이요, 새술인데 이미 익어버렸습니다. 치열하게 고민했는데 여전히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이렇습니다.

 

새 술과 새 부대가 젊은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모든 생각이 새술도 아닙니다. 사람이 아니라, 생활습관이나 종교 전통이 아니라. 가치관이나 성품이 아닙니다. 인류가 사는 모든 역사에 새 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복음이 시대의 옷을 입고 세상에 증거됩니다. 복음에 합당한 새 부대, 새 옷이어야 합니다. 복음, 즉 새술이신 예수님이 담기는 가장 좋은 새부대는 바로 십자가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한 때는 새 부대였던 그들이 언제 낡고 오래된 부대로 전락하고 만 것일까요? 그들 안에 있던 원칙이 복음보다 앞설 때입니다. 익숙함과 편안함이 복음이 주는 불편함을 앞설 때입니다. 그들은 어느새 바리새인들의 편에서 예수님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대부분 이렇습니다. 편안함과 익숙함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바리새인, 요한의 제자들,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군중들 속에 있는 여러분과 저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누가 나의 복음의 합당한 새 부대가 되어 세상에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증거하는 일에 헌신할 것인가?” 우리가 엎드려 제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변화시키시고 도우셔서 주의 종이 되게 하소서!”라고 대답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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