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사랑 | 김나래 | 2021-01-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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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의 사랑
지난 주 운전을 하다가 고속도로변에 세워진 광고를 봤습니다. 제목이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Prodigal Son'(탕자)이었습니다. 왜 저런 광고가 있지...? 궁금해서 구글링을 해봤더니 같은 제목의 미국 범죄드라마 시즌 2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왜 드라마의 제목이 탕자일까....? 내용을 찾아봤습니다. 주인공인 말콤의 아버지는 정신과의사이면서 연쇄살인범입니다. 말콤은 아버지를 닮아서 범인의 관점에서 사건을 재구성할 수 있는 독특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FBI에서는 그의 능력을 사용해서 그의 아버지의 범죄를 밝혀낼 뿐만 아니라 여러 사건들을 해결합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범죄해결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말콤이라는 한 사람의 내면에 들끓는 악마성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범죄자의 관점에서 사건을 본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충분하고 잔혹한 폭력성이 숨쉬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는 학습된 이성으로 아버지에 대한 증오로 타고난 폭력성을 다스리고자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드라마 시즌 2를 어떻게 진행할지 알 수는 없지만 작가는 서구사회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내용의 성경적인 제목을 사용했고, 의미하고자 하는 바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요즘 아가서를 설교하고 있습니다. 아가서를 읽으면서 함께 읽어야 할 성경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을 선택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룻기를 읽어야 합니다. 룻기는 한 이방의 여인이 어떻게 언약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되며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성경입니다. 두 번째 다니엘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세상이 주는 수많은 환경과 상황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세상에 속했지만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 이것이 척박한 환경 속에서 바벨론 포로의 시대를 사는 유대인들의 소망의 노래였습니다. 그리고 아가서와 함께 읽어야 할 또 한 장면을 소개합니다. 바로 탕자비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을까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했을 때... 남성과 여성의 의미에서 자녀를 생산하는 생물학적인 아버지를 말하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표현하는 최초의 기록은 출애굽기 4장 22절(...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과 신명기 32장6절(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에 있습니다.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왜 창세기의 시대에는 단 한 번도 자신과 그 백성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로 표현하지 않으시다가 출애굽기의 시대, 그들이 하나님을 잊고 노예로 살던 시대, 야곱의 내면에 있던 두 정체성.... 하나님의 언약의 계승자라는 정체성과 세상에서 성공하는 삶을 살고 싶었던 또 다른 정체성 중에서 하나님과 관계되었던 정체성이 가장 연약해지고, 세상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고자했던 열망이 처절한 패배로 끝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왜 그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시고 언약의 땅을 허락하시면서.... 하나님이 보내시는 선지자 모세를 통해서 자신과 백성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선언하셨을까요? 예수님은 탕자 비유를 통해서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발견되고, 영원하고 변함없는 관계를 약속받은 아들과 같습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것 같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품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아들은 다시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돌아온 작은 아들은 이미 큰 아들입니다. 돌아왔지만 아버지와 충돌합니다.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옴과 떠남’이 그들 안에 함께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대한 순종과 거절이 그들에게 함께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로 돌아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비유가 바로 이 비유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왔고, 또 하나님을 배반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떠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우상을 섬깁니다. 아가서에서 하나님은 탕자를 품으시는 아버지이며, 검게 거을리고 세상에서 조롱당하는 술람미 여인을 조건없이 사랑하는 지존한 왕입니다. 그 사랑의 완전함이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넘어섭니다. 그 사랑 안에서 늘 새롭게 발견되고 누리며 사는 우리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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