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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누카(수전절/修殿節), 그리고 메시야 김나래 2022-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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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누카(수전절/修殿節), 그리고 메시야  

 

솔로몬 왕 이후 르호보암왕의 시절에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갈라집니다.  남유다는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위가 계승되고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의 새로운 왕조가 시작됩니다.  그때가 B.C.930년 경입니다.  그리고 B.C. 721년 호세아 왕 때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침입으로 멸망당합니다.  그리고 B.C,586년 남 유다가 바벨론의 침략으로 멸망당합니다.  이후 그들은 페르시아와 헬라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헬라 제국은 그들 자신이 다신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보편적인 자유를 허락했습니다.  하지만 안티오쿠스4세라는 왕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의 신상을 세우고 제사하게 했습니다.  할례와 안식일 제도를 폐지하게 했고, 심지어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매월 25일이 되면 돼지를 잡아서 제단에 바칠 것을 강요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유대인들을 고문하고 투옥했으며 십자가와 교수형에 처형하기도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반발했습니다.  B.C.167년 제사장 맛디아는 예루살렘 북서쪽에 있는 모데인에서 자신의 다섯 아들과 함께 우상의 신상을 깨부수고 항쟁을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광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의 다섯 아들 중에 가장 용맹했던 셋째 아들의 이름이 유다마카비입니다.  전쟁은 3년간 계속되었고, 결국 그들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성전을 회복합니다.  그들이 성전을 회복하고 우상으로 가득 차 있던 그곳을 정결하게 하는 날이 있었습니다.  우상과 그 앞에 드리는 제물로 더렵혀진 성전을 유대인들을 피눈물을 흘리며 정결하고 거룩하게 회복했습니다.  그날이 바로 BC164년 기슬월 25일, 즉 12월 25일입니다.  그날을 ‘하누카’(수전절)라고 불렀습니다.  성전을 정결하게 한 다음 그들은 성대한 축제를 8일 동안 열었습니다.  등잔을 8개 준비하고 하루에 하나씩 점등합니다.  유대인들의 의식에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하누카 촛대가 그래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 또한 유대인이며 당연히 수전절을 지키셨습니다.(요 10:22-23)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누카는 유대인들의 가장 큰 절기가 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은 한편으로 고난의 역사를 가진 민족입니다.  그들은 다윗과 솔로몬 이후에 자랑할만한 역사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했고, 스스로 분열과 다툼이 계속되었고, 결국 주변의 열강에 의해 처참하며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제국의 식민지로서 오랫동안 치욕을 삶을 살면서 그들은 오직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B.C. 721년에 멸망당했던 유다제국이 유다 마카비에 의해서 재건되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조선왕조 500년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약 550년의 시간동안 식민지로 살았습니다.  제국의 압제가 가장 극심했던 때... 그들과의 일방적으로 불리했던 3년간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예루살렘과 성전을 회복했던 영웅이 바로 유다마카비입니다.  그는 유다의 왕이 되어 하스몬 왕조라 불리는 새 왕조를 시작합니다.  그는 주변의 이방인의 나라들을 정복하며 다윗 제국의 영광을 재현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지중해 주변을 정복했던 로마와 싸우기에는 힘이 약했습니다.  B.C.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에 의해 1만2천명이 학살당하면서 패망합니다.  이후 예수님의 시대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 그들은 로마의 식민으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마카비는 마치 메시야와도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누구를 어떤 모습으로 보내실지 모르지만 메시야라면 모름지기... 당연히... 마땅히 마카비와 같아야 합니다.  나라를 재건하고 성전을 정결하게 하고 모든 유대인들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라고 물었던 것, 제자들이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큰 영광과 권력을 원했던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9장에서 삭개오에게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를 선언하시고, 함께 있는 청중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을 발견하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눅 19:11-12)  메시야와 함께 영광의 나라를 기다리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사람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메시야 사역을 설명하십니다.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을 하누카를 가장 중요한 절기로 지킵니다.  그들의 영광의 때를 소원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영광은 이 땅의 제국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영원하고 영광된 그 나라는 이 땅에서 고난의 십자가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는 삶에서 하나님 나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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