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집사? | 김나래 | 2023-01-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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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집사?
저희 집에는 고양이가 한 마리 있습니다. 성일이와 승하가 성화를 부려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모두들 예쁘다고 하는데, 저는 딱히 대단히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제가 자신을 그렇게 예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지 이 녀석과 사귀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이 녀석은 저를 필요로 할까요....? 저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을까요? 이 녀석의 존경과 사랑을 바라지는 않지만 적어도 권력의 서열은 좀 잡히면 좋겠는데.... 그 일이 쉽지가 않습니다. 머리가 나쁜 것 아니면 본성이 그런 겁니다. 소파에 좀 기대고 있으면 제 머리 위를 휙휙 지나가고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으면 제 무릎에 뛰어올랐다가 제가 놀라면 뛰어 내려가기도 합니다. 방이고 화장실이고 문을 열면 쫓아 들어왔다가 구석 어느 속에 숨어서 숨바꼭질을 시전하기도 합니다. 아... 저를 좋아할 때가 있습니다. 간식을 줄 때입니다. 고양이 장난감으로 놀아줄 때입니다. 졸릴 때 목을 긁어주면 아주 애교가 장난이 아닙니다. 하지만 대부분 애교는 아주 짧은 시간으로 끝나고 곧 발톱을 세우고 이빨을 드러냅니다. 저는 아마도 이 녀석과 친해지는데 좀 더 시간이 걸리거나 결국 실패할 것 같습니다.
흔히들 고양이는 길들여지지 않는다고들 하더군요. 고양이를 길들이기보다는 차라리 사람이 고양이에게 길들여지는 것이 낫다고도 하구요. 그래서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들을 고양이 집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저는 단연코 저를 고양이의 집사로 부르는 것을 반대합니다. 그래서 길을 들여볼 마음을 먹었습니다. 고양이가 먹을 것이 부족한 건지, 아니면 호기심이 많은 건지 모르겠는데 자꾸 식탁에 올라오거든요. 저는 아무리 애완동물이고 함께 생활한다고 하지만 고양이의 식탁과 저의 식탁은 좀 구별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식탁을 그 녀석과 저의 경계로 삼으려고 노력해봤습니다. 하지만 역시 고양이는 고양이더군요. 식탁에 올라왔다가 제가 겁을 주면 잽싸게 도망을 갈지언정 식탁에 대한 관심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언제까지 이 녀석과 주거공간을 함께 할지는 모르지만.... 이 녀석과 함께 지내는 한 식탁의 경계에 대해서 이 녀석을 길들이는 일을 계속해 볼까 합니다.
저는 조금 전에 ‘길 들인다’는 말을 썼습니다. 영어로는 'tame'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반대말은 wild입니다. 반대말을 wild라고 하면 tame의 의미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원래 가진 본성이 있는데 두 관계의 주도권을 가진 나에게 맞춰서 그 야생성을 적당하게 버리거나 잘라내고 온순하고 복종하는 성품으로 바꾼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tame은 굉장히 권력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어쩌면 좋은 단어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tame 이라는 말의 반대말이 wild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요한1서에서 요한 사도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소망이며 구원의 근거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리석고 악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거절하고 외면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과 어리석은 우리는 어떻게 연결될까요? 이 둘을 연결시키는 것이 바로 ‘사귐’입니다. 영어로는 fellowship이라고 번역했는데요, fellowship을 번역하면 ‘교제’ 아닙니까? 영어 번역 fellowship보다 한글 성경에서 사용하는 '사귐‘이라는 단어가 훨씬 의미와 깊이에 있어서 좋은 번역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하나님이 어리석고 악한 우리를 사귀어주심으로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귀시는 방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 신의 본체를 버리고 사람으로 우리와 같이 되셔서 우리를 만나시고 사귀시고 사랑해주셨습니다. 사람을 사귀고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귐의 가치와 사랑의 능력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길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고양이 하나 제대로 길들일 능력이 없습니다. 고양이와 저는 같은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를 충분히 길 들이실 능력과 권위가 있지만 길들이는 일을 내려놓으시고 사귀는 일을 선택하셨습니다. 성도와 교회는 하나님의 사귐의 대상입니다. 사귐이란 나에게 맞게 길들이고 즐거워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사귐은 나의 사랑으로 그의 변화를 만들고 그의 변화를 위해 내가 먼저 변화하과 헌신하는 관계를 말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귀시는 분입니다. 그 사귐을 위해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먼저 자신을 희생하셨으며, 먼저 죽음으로 사귐의 가치를 증명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고귀한 사랑의 주님과 사귀는 성도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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