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에 실패하다 | 김나래 | 2023-01-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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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에 실패하다.
일반적으로 문명(文明)과 문화(文化)를 구별해서 말합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문명은 Civilization으로 번역합니다. 문자와 도시, 기술의 축적과 사회 분화 등이 문명의 요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화는 Culture로 번역합니다. Culture란 농사에 어원이 있습니다. 사람이 노동하지 않고 자연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는 단계에서 노동으로 의식주를 해결하게 되면서 만들어내는 삶의 방식들이 문화입니다. 오늘날은 문화의 개념에 정신과 가치의 측면을 많이 강조하기도 합니다. 요즘 가끔 발견되는 원시부족들에게 문화는 있지만 문명은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은 그들만의 독특한 삶의 방식과 경험의 전수는 있으되 문자가 없고 축적된 지식의 전달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명이든 문화이든 사람이 사는 모든 공동체가 가지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오랫동안 고립되고 단절된 삶을 살던 소수부족이나 큰 제국을 이루는 통일국가가 함께 가진 공통의 유산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만의 신앙의 체계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는 세계 2차 대전 직후에 이 소설을 집필했고, 핵전쟁이 일어났다는 위기상황을 전제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영국 정부에서는 소년들을 선발해서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려 했지만 비행기가 추락하게 되면서 소년들은 무인도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아직 어린 소년들이 여러 어려운 상황들 속에서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들에서 인류가 가진 근본적인 본성과 갈등의 원인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도 소년들은 자신들의 현실에 대한 절망과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서 그들만의 신앙의 체계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알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을 향한 막연한 두려움이 때로 그들을 난폭하게 하고, 때로 연약하게 하며, 때로 용감하게 하며, 때로 어리석게 만듭니다. 그들은 서로 편을 나누어 싸우고 죽이기도 합니다. 골딩은 이 소설을 통해서 인류 문명의 한계와 어리석음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인류는 두려움과 욕망에 사로잡혀 우상을 만들고 스스로 우상의 노예가 되는 일을 반복하고 있고, 그 결과는 전쟁과 학살이라는 것입니다.
구약 이사야의 시대는 선지자가 절망하는 시대였습니다. 이사야는 웃시야왕 때부터 선지자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웃시야는 좋은 왕이었지만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장을 대신해서 제사를 드리려고 하다가 나병을 얻습니다. 왕위를 아들 요담이 물려받습니다. 요담은 아버지의 실패를 보면서 많이 조심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요담의 시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오직 산당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왕하 15:35) 그는 교만해서 징계를 받은 아버지를 보며 스스로 근신했지만 자신이 다스리는 백성들의 배교를 막지 못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산당에서 우상을 섬기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요담 다음으로 아하스왕이 집권합니다. 그는 잘사는 나라를 만들고 싶어했던 왕입니다. 그는 잘살고 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북이스라엘과 친화하고 그들이 섬겼던 우상을 받아들입니다. 요담의 시대에는 왕은 하나님을 섬기고 백성들은 우상을 섬겼는데 아하스의 시대에는 왕이 먼저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 히스기야는 아버지의 우상숭배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경험했고, 그는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왕으로 살기 위해 애썼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과 우상을 함께 섬겼고, 히스기야은 교만의 장벽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이사야의 시대, 네 왕의 시대를 요약해볼까요? 네 왕은 모두 예배하는 왕이었습니다. 백성들 또한 예배했습니다. 문제는 누구를 위한 예배이며 어떤 예배를 드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왕은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어떤 왕은 자신은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했지만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도록 방치했습니다. 어떤 왕은 하나님을 섬기고 은혜를 누렸지만 그 은혜를 자신의 영광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교만의 이유로 삼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에 실패한 왕, 예배에 실패한 백성들이었습니다.
종교성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특징입니다. 문제는 예배의 대상과 방법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에 성공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의 욕망과 두려움을 예배할 수 있고, 우상을 통해서 자신의 욕망을 현실화하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통한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우리의 삶을 통해 실현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말했지만 아무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성공하지 못했던 안타까운 시대에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이 창조의 목적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교회와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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