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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김나래 2023-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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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얼마 전에 자신이 소방관으로 30년을 일하고 다음 달에 은퇴를 한다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잘 갖춰진 삶을 사는 흑인이었고, 자신감 있는 말투와 몸짓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와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자신은 West Philly에서 태어나서 자랐고, 지금 그곳에서 소방관으로 일했다고 했습니다.  많이 칭찬해줬습니다.  환경으로 보면 건강하게 성장하고 바르게 살기가 참 힘들었을 것인데 소방관으로 살면서 많은 사람을 구하고, 또 이렇게 영광스럽게 은퇴를 준비한다고 하니 당신 대단한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분 스스로도 동의했습니다.  자기 주변에 함께 성장했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우리 교회가 매주일 Kenshington Ave로 빵을 들고 나가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반응이 뜻밖이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하는 일에 선한 마음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했던 이야기는 제가 일반적으로 많이 듣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들은 충분히 그런 상황과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지가 없거나 그런 생활을 즐기거나 아니면 스스로의 가치를 포기한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자신은 꼭 그들을 도와야 한다면 돈을 주기보다는 직접 먹을 것을 사주는데, 자신이 직접 먹을 것을 사준다고 하면.... 대신 돈을 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약을 사기 위해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많은 부분 동의가 되기도 하고, 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은 그의 성장의 경험, 성공의 경험이 여전히 게토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을 평가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데 사용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사람은 환경적 존재이고 관계적 존재입니다.  함께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제자들도 바리새인들의 율법적 사고에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사람을 앞에 두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소경으로 살고 있다는데.... 그의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자신의 죄 때문입니까?”  이 질문은 지극히 바리새적입니다.  그들에 의하면 어떤 사람의 고통의 삶의 현실은 그의 부모나 조상, 혹은 자신의 악한 삶의 결과입니다.  그가 극복할 수 없는 큰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당연히 그와 부모의 죄와 악이 컸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런 방식의 논리와 철학으로 유대인들을 감염시켰고, 예수님의 제자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아직 그들의 마음에 먼저 심긴 율법적 사고에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예수님이 세상을 만나실 때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민망하게 생각하시고 긍휼히 여기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 사람들의 처참한 삶의 현장을 걸으시면서 때로는 들풀같고 때로는 들꽃같은 그들을 만나시고 만지십니다.  때로는 이미 짓밟혀서 스스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을 도와서 일어나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만나실 때 사용하신 마음은 평가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마음이 아니라 용납하고 품으시는 마음입니다.  그들의 연약함과 부족함과 아픔은 예수님의 사랑이 필요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품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습니다.  당시 나병환자들은 접근이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나병환자 열명이 예수님께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을 때 그들을 만나주십니다.  가슴을 치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하는 세리를  품어주십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심지어 귀신이 들린 아들을 데리고 온 아버지를 만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십니다.       

 

그러나 성경의 곳곳에서 우리가 만나는 또 다른 마음, 세상 사람들은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과 반대였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에게 다가오는 어린 아이들들 쫓아내고, 긍휼을 사모하며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는 소경 바디매오를 시끄럽다고 조용히 하라고 외쳤고, 귀신이 들린 가나안 여인이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외침을 외면했습니다.  심지어 불행을 당한 사람의 죄를 묻고 정죄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공감하거나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 평가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그 시대에 로마의 식민지가 된 것은, 수백 년 제국들의 식민지로 사는 것은 그들의 죄 때문입니까?  그들 조상들의 죄 때문입니까?  로마의 부흥과 번영은 그들 조상의 공덕 때문입니까?  아니면 로마 황제가 선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서 그런 것입니까?  

 

우리는 이번 주일도 예배를 마치면 도시락을 들고 켄싱턴 거리로 나갑니다.  그곳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고, 우리 주님의 마음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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