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하라!" | 김나래 | 2023-05-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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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하라!"
“목사님, 저는 왜 늘 이럴까요? 남편도 저를 버렸어요. 사람들은 저를 다 무시하고 멀리해요 그런데 이제 아들까지도 나를 버리네요. 나는 왜 늘 이렇게 살아야 하지요?”
상담을 할 때마다 같은 말씀을 하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상담이 그 이상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상담할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 고통이 얼마나 특별한 것인지를 설명하고 눈물 흘리지만 그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삶의 문제에서 자신을 분리시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늘 고통이 반복되는 삶에 자신을 방치하고 있었고, 날마다 더 깊이 고난의 숲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때로 지극히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면 자신의 슬픔과 아픔 속에서 자신의 삶을 발견하게 되고 그런 자신을 모든 사람이 이해해주고 받아들여주기를 바라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고난보다 자기 안에 고난을 대하는 태도가 다 큰 문제가 됩니다. 시험과 고난의 숲에서 빠져 나와서 자신을 하나님이 보시는 눈으로 바라보고 무엇이 변화시켜야 하는지,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답을 얻어야 하는데, 그 숲의 깊이와 높이만 바라보면서 눈물짓고 한숨지으며 자기 연민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나는 환경의 피해자가 되고 맙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때... 사탄은 여러 거짓말로 성도를 유혹화고 시험합니다. 그중에 가장 큰 거짓말이 성도의 절망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당하는 시 험과 고난은 너무 크고 높고 깊다고 말합니다. 내 인생은 완전히 그 고난과 시험 가운데 빠뜨려졌고 나는 그것을 도저히 헤어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포기하라, 절망하라, 단념하라, 그대로 받아들이라, 한숨쉬라, 그 절망의 숲에서 자신을 원망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속삭입니다. 이것이 고난과 시험에 대한 사탄의 첫번째 거짓말입니다.
시편 66편에는 성도의 모든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12절에서 시인은 자신의 삶을 표현하기를 ‘우리가 물과 불을 통행하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10절에 '은을 연단하는 것'과 연관지으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시인은 자신의 삶의 고통의 정도가 뜨거운 불과 차가운 물이 번갈아서 자신의 삶을 달구었다고 식혔다가를 반복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치열하고 고달픈 인생일까요? 그러나 시인의 고달픈 인생이 시편의 아름다운 찬양으로 끝맺을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고통 가운데서 빛나는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고난과 고통이 아름답고 순수한 은을 만드는 과정임을 시인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들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의 허리에 두셨으며 사람들로 우리 머리 위로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물과 불을 통행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시 66:10-12)
성도의 모든 시험과 고난에는 하나님의 높고 거룩하신 뜻이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시선을 고난의 숲에 집중하게 하고 우리에게 "절망하라! 절망하라! 절망할 수 밖에 없다!"고 끊임없이 속삭이지만, 우리 하나님의 진실은 그 고난 뒤에 있는 순결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목적에 있습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고난을 넉넉하게 이기고 살아가는 모든 성도에게 허락된 승리와 소망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는 우리를 기다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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