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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닷사 vs. 에스더 김나래 202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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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닷사 vs. 에스더 

 

수목이 귀한 팔레스타인 지역에 정착했던 유대인들이 사랑했던 나무들 중에 ‘도금양’(myrthle)이라는 나무가 있습니다.  개역 성경에는 ‘화석류’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이 나무는 유대인들에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초막절에 집을 장식하는데 감람나무와 소나무, 야자나무와 함께 도금양 나무를 사용했습니다.  풍요와 성공을 상징했습니다.  또한 잘 시들지 않고 가지를 꺾어 땅에 꽂으면 뿌리를 내릴 정도로 생명력이 강했기 때문에 생명과 부활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장례식에서 도금양 나무를 관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의 신부들은 결혼을 할 때 화관을 썼습니다.  화관의 재료가 되는 것이 바로 도금양나무의 꽃이었습니다.  그들은 도금양 나무에서 수많은 잎이 나오고 예쁜 꽃이 열리는 것처럼 신부에게서 많은 자녀가 생산되기를 기원했습니다.  그 나무에 피어나는 희고 고운 꽃은 ‘하닷사’라고 불렸습니다. 이스라엘의 포로기에 기록된 여러 성경 중에서 에스더는 제국 바벨론이 멸망하고 메대 바사 왕국을 지나서 통일 페르시아 왕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페르시아의 왕 아하수에로의 왕비가 바로 에스더였습니다.  그리고, 에스더의 히브리 본명은 ‘하닷사’였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포로로 잡혀온 이방의 땅에서 예쁜 딸을 낳았습니다. 그들은 고향의 땅에서 해방과 자유를 축하하며 집을 장식했던 도금양 나무와 어여쁜 신부들의 머리를 장식하던 꽃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딸의 시대에는 조국으로 돌아가 회복과 부흥의 때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온 민족이 함께 도금양의 화관을 쓰고 함께 제사하며 축제하는 꿈을 꾸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딸에게 ‘하닷사’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안타깝게도 하닷사의 부모는 일찍 죽고 맙니다.  그녀는 ‘모르드개’라는 사촌 오빠의 손에 자랐습니다.  이방의 왕의 신부가 되어 하닷사로 만든 화관이 아닌 에스더의 이름으로 페르시아의 왕궁의 화관을 쓰게 되었습니다.  에스더는 바벨론 사람들이 섬기던 ‘이슈타르’(Ishtar)라는 여신의 이름에서 왔습니다.  ‘별’이라는 뜻입니다.  그녀가 언제부터 에스더라는 이름을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녀의 본명이 하닷사였다는 것과 그녀가 에스더로 불렸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포로기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이방의 우상의 이름을 따라 새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모르드개 역시 그랬습니다.  그의 이름은 ‘마르둑’이라는 바벨론의 신의 이름을 따라 지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스라엘이요, 벤냐민 지파의 후손으로 분명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과 때를 사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동생인 에스더 또한 같은 생각과 삶을 가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에스더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4:14) 

그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때에 대하여 깊이 고민했고, 자신과 동생이 하나님의 일에 사용되기를 원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헌신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 민족의 회복과 부흥을 위하여 다른 방법을 사용하실 것이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살지 않았던 이유로 함께 멸망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이다.”   에스더는 오빠의 이 말을 듣고 결단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는 결단은 바로 여기에서 왔습니다.  에스더가 말씀과 믿음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방의 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한 여인으로 살다가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하나님의 뜻과 때에 순종하기를 원했을 때 거친 광야와 같은 이방의 땅에서 회복과 부흥의 꽃으로 피어났습니다. 

 

우리는 오늘 에스더의 시대보다 훨씬 강력하고 간교하고 어두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진리와 거짓이 구별되지 않고, 하나님과 세상이 구별하기 어려우며, 하나님의 뜻과 나의 욕망이 섞인 시대를 삽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내가 누구이며 어떻게 불리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소원으로 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살아가는 나, 하닷사.... 우리, 하나님의 자녀....로 고백할 수 있기를 바라고.... 그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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