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들고 산 위에 서다. | 김나래 | 2024-07-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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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들고 산 위에 서다.
‘이해인 수녀’라는 분이 있습니다. 좋은 글을 많이 쓰시기 때문에 대부분 그 이름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 분이 자신의 인생을 조명하면서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인생이란 매일매일 산을 오르내리는 것입니다. 하나의 산을 간신히 넘으면 그보다 더 높은 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매일매일 크고 작은 산을 오르내리게 하시는 이유는 인생에서 가장 크고 높고 결정적인 ‘마지막 산’을 성공적으로 오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그 운명적 마지막 산을 오르기 위한 연습으로서 일상의 삶 속에서 작은 산들을 계속 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여러분에게 넘기 어려웠던 산이 있습니까? 유다 말기에 선지자 요나의 뒤를 이어 앗수르의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했던 선지자가 있습니다. 나훔입니다. 그는 니느웨에 대한 심판의 복음을 선언하는 중에 자신의 민족인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를 잊지 않습니다. 그는 유다에 대해 이렇게 전했습니다.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시니라”(나훔 1:15)
복음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첫째 십자가로 말미암는 구원의 은혜에 관한 소식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증거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믿는 우리들에게 복음은 어떤 의미와 역할을 할까요? 그것은 십자가의 능력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역사하고 가치관과 인격에 역사하고 개인의 관계와 사회의 변화에 역사합니다. 복음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십자가의 능력에 관한 소식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십자가의 은혜에 관한 것이든 십자가의 능력에 관한 것이든 복음과 사람 사이에는 늘 높은 산맥이 가로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시대에 유대인들은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은혜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들과 십자가 사이에 유대주의와 특권의식이라는 높은 산들이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받은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제 아무런 넘어야 할 산도, 건너야 할 강도 없는 신앙생활을 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끊임없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십자가의 능력에 대해 설교했고,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는 일에 대해 설교했으며,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것을 설교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한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가치를 변화시키고, 삶을 바꾸며, 관계에 변화의 열매를 만들고, 당시 제국 로마의 절대적 권위를 무너뜨리게 됩니다. 다만 이런 과정을 만드는 일은 복음을 받은 성도와 교회가 넘고 또 넘어야 하는 산이며, 산맥이며... 끊임없이 걷고 또 걸어야 하는 광야이며, 늘 새롭게 만나는 강물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오늘날 복음이 가장 필요한 곳은 교회일지도 모릅니다. 복음은 성도들에게 더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십자가의 은혜, 구원의 은혜에 집중해왔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음을 의심하지 않는 일에 집중해왔습니다. 그랬더니 복음은 딱.... 산 위에만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임한 복음이 내 삶의 영토에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임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참 오래 믿었는데,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가 내 삶에 철철 흘러 넘치는데.... 나는 변화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변화되지 않습니다. 교회로 말미암아 지역사회와 시대가 복음적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복음의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 날마다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 복음의 영향력은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의 산에 오르는 일까지만 하는 것 같습니다. 구원의 기쁨을 맛보고 느끼는 은혜의 산에 올랐다면.... 이제는 그 복음을 들고 그 산 너머에 있는 십자가의 능력이 인도하는 삶의 영토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로 말미암는 은혜와 능력의 복음을 허락하셨습니다. 나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바꾸는 복음이며 나를 통해서 세상에 증거되어야 할 복음이며 세상을 변화시킬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산 위에 멈추는 성도와 교회가 아니라 산을 넘어서며 강을 건널 수 있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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