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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나그네의 윤리, 환대 na kim 2016-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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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역대상29:10절 개역한글

10.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가로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제공: 대한성서공회

[성경본문] 역대상29:14-15절 개역한글

14.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15.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2015. 12. 9. Slow Church

 

12. 나그네의 윤리, 환대(대상 29:10, 14-15)

 

예수님은 잔치를 베푸는 주체이자 동시에 잔치에 쓰일 음식, 즉 생명의 근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기 위해 어떤 대가가 치러졌는지 잘 알고 있다. 바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다. 그의 희생의 피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했고, 우리는 성찬을 통해 이를 기념한다. 따라서 함께 식탁 교제를 나눈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실존을 가장 친밀하게 경험하는 것이고 동시에 가장 기본적인 환대를 표현하는 것이다.”(크리스틴 폴/손대접,p.92)

 

하나님이 베푸시는 풍성한 은혜에 대한 성도의 가장 적절한 영적 반응은 감사입니다. 그렇다면 감사함의 실천은 무엇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혜를 우리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너그러이 나누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풍성함은 우리의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이 값없이 누구에게나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풍성한 공급하심에 대한 성도의 감사는 이웃의 필요를 돌아보고 나누며 채우는 넉넉한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일반적으로 나눔과 섬김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자선 활동일 것입니다. 물론 자선 활동은 계속되어야 할 선한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자선활동은 도움을 주는 사람과 도움을 받는 사람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만들어지고 전해지는 물질이 그 거리를 채우게 됩니다. 자선활동이 사라지면 거리도 사라집니다. 하지만 교회가 이웃을 섬기는 사역은 거리를 좁히고 사람을 얻는 과정입니다. 교회는 물질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나누며 삶을 나눕니다. 교회와 성도의 마음과 삶은 이미 하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섬김은 곧 복음적인 섬김이면서 복음 자체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임했던 것처럼 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복음은 우리의 삶이 되고, 우리의 삶은 복음의 도구가 됩니다.

 

1. 환대의 차이

 

고대 근동지방에는 나그네에 대한 환대의 풍습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전쟁과 정복, 반복되는 약탈과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은 서로가 평화의 관계임을 확인하면서 비록 알지 못하는 관계이지만 친절하게 환대하는 풍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굳이 선의가 아닌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전략이기도 했습니다. 나그네들은 누구나 3일 정도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발을 씻을 물과 식사, 거처를 제공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도움은 친구, 이방인, 심지어 적들에게까지도 제공되기도 했습니다. 사막과 광야가 계속되는 특수한 환경이었기 때문에 자신도 언제든지 나그네가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정도의 환대를 베푸는 풍습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나그네에 대한 환대는 다른 근동지방의 문화와는 달랐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독특한 영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그들의 환대의 기준은 자신의 평안을 위해서, 혹은 염려와 걱정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환대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헷족속에게 자신을 나그네라고 소개했습니다.(23:4) 요셉의 아버지 야곱은 바로왕 앞에서 자신을 나그네라고 소개합니다.(47:4,9) 나아가서 오늘 본문인 다윗의 고백을 봅시다. 그는 자신이 아닌 아들의 대에 성전을 건축하게 된 것을 감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이르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우리는 우리 조상들과 같이 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희망이 없나이다”(대상 29:10, 13-14)

 

얼마 전에는 페이스북의 창업자인 마커 주커버그가 자신의 페이스북 지분의 99%를 기부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총액이 거의 52조원에 달합니다. 한 사람의 사업자가 할 수 있는 선행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의 선교활동의 총액보다 많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선행은 그저 선한 행위일 뿐입니다. 믿음도 구원도 십자가도 없습니다. 비록 약하고 부족해보여도 오늘 교회와 성도의 선행은 그것과는 다릅니다. 출발이 다르고 목표가 다릅니다. 성도의 선행의 출발은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감사요, 목표를 그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5:16))입니다.

 

2. 환대해야하는 두 가지 이유

 

그렇다면 믿음으로 사는 성도와 교회가 서로, 이웃을 환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5:23-24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25:23-24)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소유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들은 잠시 하나님의 것을 빌려 쓰는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먼저 나그네가 되는 경험을 수백 년간 하게 하셨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매일 경험했던 것처럼 나그네로서의 이스라엘은 매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었습니다.

 

23:9에는 환대의 또 하나의 이유를 소개합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23:9) 같은 말씀이 레위기 19:33-34에도 소개됩니다. 거류민이 너희의 땅에 거류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19:33-34)

 

하나님은 나그네인 그들을 사랑하셔서 약속의 땅을 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으로 전하는 나라와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들이 서로를 환대하며 이웃에게 사랑의 섬김과 나눔을 실천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들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이며, 그들도 과거에 같은 나그네였기 때문입니다. 18:32-33에는 동관(同官)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았던 한 신하에 대한 왕의 진노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18:32-33) 우리가 서로를 환대하고 이웃을 품어야 하는 두 가지 이유가 이 비유 속에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3. 환대의 원칙과 확장

 

14:12-14에서 예수님은 독특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14:12-14) 교회와 성도의 선행은 보답에 대한 기대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충분히 보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고 하고, 우리에게 보답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영광 돌리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일도 전도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드라마처럼 그려진 장면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입니다. 영생을 묻는 율법사에게 예수님은 기대한 것과 다른 답을 주십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10:36-37) 교리를 물었지만 삶을 말씀하신 것이요, 자기 자신에 대해 물었지만 관계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요, 영생에 대해 물었지만 이 땅에서의 이웃에 대한 선행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412-14의 말씀이 가장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 선한 사라미라인의 비유이며, 그것이 삶으로 실천되고 있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공생애입니다.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선행,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동기가 되고 하나님의 기쁨이 목적이 되는 선행, 선행의 대상을 하나님께 연결하고 나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도구로만 사용되기를 원하는 삶이 이 말씀에 순종하는 교회와 성도입니다.

 

오늘날 환대는 교회를 통하여 그 동기와 목적을 달리해서 실천되고 확장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구제는 자기 의와 영광과 자기 삶의 보람과 의미를 위해 실천됩니다. 하지 않아도 비난받지 않고, 하면 자기 의와 보람을 얻습니다. 죄와 악이 성행하는 세상에서 보다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소원하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와 성도의 환대는 세상의 것과는 다릅니다. 동기가 내게서 시작되지 않고 목적 혹은 결과가 나를 향하지 않습니다. 동기는 하나님의 은혜요 목적과 결과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주신 것으로 하나님의 마음이 가는 대로 헌신하고 나누어져서 하나님의 기쁨을 만들 뿐입니다. 때문에 하는 것은 의무이자 윤리이지만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무력하게 만드는 삶이요, 죄에 속합니다. 주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내가 기뻐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4. 마지막 한 가지 이유, 예수님을 만나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심판에 대한 비유를 주십니다. 열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준비하는 삶에 대해 말씀하신 예수님은 마지막 양과 염소의 심판을 비유를 통해서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십니다. 오늘의 말씀의 주제인 환대의 관점에서 이 비유를 보면 비유의 초점이 명확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신앙이 다 인정받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마 7:21-23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7:21-23) 예수님의 우리들에 대한 평가와 판단이 종교활동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 25장에서 예수님은 같은 맥락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25:34-36) 그리고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 비유 속에 있는 의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24:40) 예수님은 이 땅에 스스로 나그네로 오셨고, 머리 둘 곳 없는 삶을 사셨고, 십자가에서 버림받으셨습니다. 죄와 악으로 세상을 떠돌며 먼지처럼 사라질 우리들을 사랑하셨고 우리들과 같이 되셨고, 우리들이 되셨습니다. 교회와 성도가 죄와 악이 많은 세상을 환대하는 선한 이웃의 삶을 살아야 하는 마지막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십자가를 함께 질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예수님과 동역할 수 있습니다.

 

이미 비교할 수 없는 큰 환대를 예수님으로 부터 받은 우리들입니다. 이제 우리가 세상으로 가서 이와 같이 해야 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실천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이 그 삶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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