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식탁의 교제 | na kim | 2016-01-18 | |||
|
|||||
[성경본문] 누가복음14:12-14절 개역한글12.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13.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14.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2015. 12. 23. Slow Church 13. 식탁의 교제(눅 14:12-14) 유진 피터슨 목사는 교회가 취하는 양극단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 바 있습니다. ‘화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집중하다보니 이웃과의 경계가 허물어진 교회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편하고 안락한 환경 속에서 신앙생활을 계속하다보니 공동체의 경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관심과 사역을 살피지 못하는 교회 또한 생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쪽 극단은 사회와의 화목에 집중하다보니 성도와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잃게 되는 위험이 있고, 다른 한쪽 극단은 교회 공동체의 테두리 안에서 자기만족적이고 안락한 신앙생활을 계속하게 되는 위험이 있습니다. 사역은 성장했지만 신앙 공동체의 예배를 잃기도 하고, 예배는 발전하는데 공동체의 울타리는 넘는 사역은 상실하기도 합니다. 그는 이 두 극단이 가진 긴장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그것은 먼저 우리가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의 방향과 목적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풍성하고 영적인 문화를 생산해야 합니다. 그는 인류의 역사 속에 찬란하게 빛나는 신앙적 문화유산을 기억합니다. 교회 음악과 미술, 건축과 문학 등의 다양한 방면에서 성도와 교회는 문화의 옷을 입혀서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리차드 니버의 유명한 저서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교회는 문화의 옷을 입고 시대의 문화를 변혁시키는 사명을 감당했었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두 극단 사이에서 타협하지 못하는 현대 교회에 대해 ‘영적인 문화’라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한 시대와 지역 사회 속에 존재하면서 공동체의 울타리 안에서 개발해야 하고, 울타리는 넘어 전해야 하는 가장 큰 영향력은 영적인 문화입니다. 때로는 복음이 문화의 옷을 입고 전달될 것이요, 때로는 복음은 문화라는 마차를 타고 적진으로 돌격하게 될 것입니다. 1. 나만을 위한 식탁, 섬기고 나누는 식탁 요즘 가끔 식당의 손님들이 종업원에게 3000불, 5000불 등의 거액의 팁으로 놓고 가서 화제가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 중에 어떤 할머니는 종업원이 친절하게 자신의 말을 들어준 것이 고맙다는 이유로 큰 액수의 팁을 놓기도 했습니다. 저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여행을 하던 중에 다이너에서 혼자 식사를 하고 있는데 옆 테이블의 할머니 한 분이 제게 말을 걸었습니다. 어디서 왔는지, 뭘 하는 사람인지, 왜 혼자 식사를 하는지 여러 가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제게 같이 식사를 하도 되는지 물었습니다. 처음에는 좀 이상했습니다. 혹시 돈이 없으신가... 다른 의도가 있으신가... 생각하다가 그러자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너무 기뻐하면서 제 테이블로 오셨습니다. 정말 수다스럽게 자녀 이야기, 고향 이야기를 하면서 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알고 보니 혼자 식사하는 것이 너무 싫었다고 했습니다. 제가 먹은 것까지 계산을 하려는 것을 못하시게 했습니다. 할머니는 헤어지면서 여러 번 고맙다고 인사하셨습니다. 미국에서 여행을 하면서 잊혀 지지 않는 기억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저는 혼자 여행하고 혼자 식사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운전을 하면서 식사를 마치기도 합니다. 사무실에서 혼자 이것저것을 펼쳐놓고 먹는 것도 괜찮습니다. 저의 독립적인 성품도 그러하고, 개별화를 강조하는 현대 문화 속에 이미 익숙해져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시간과 감정의 소모를 줄이기 위해 나 혼자만의 식탁, 필요한 영양만을 흡수하기 위한 식탁....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식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식탁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설명할 때 잔치의 이미지를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잃은 것들을 찾는 모든 순간에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왕은 늘 사람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식탁을 배설하고 함께 모여 감사하며 나누는 것은 천국의 그림자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개인화, 개별화를 강조하는 우리 시대에 함께 전하고 나누어야 하는 영적인 문화 중 하나는 바로 공동체의 식탁의 문화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하셨고, 죄인들과 함께 하셨고... 경계가 없었고 차별이 없었고...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로부터 비난받고 손가락질 당했지만 결코 빼앗기지 않았던 예수님의 식탁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식탁을 회복하고 전해야 합니다. 그 식탁의 흔적이 없는 성도와 교회를 예수님은 마지막 날 책망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4-36)
2.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기념하고 기억해야 할 의식이 있습니다. 바로 ‘성만찬’입니다.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오늘날 현대화된 동양 문화권의 식사를 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떡과 포도주라는 성찬의 음식은 좀 독특할 수 있겠지만, 당시에는 그 음식이 일상적인 식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식탁의 교제를 하셨고, 그 식탁에 있던 떡과 포도주에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먼저 이것은 유월절을 가리키는 말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식탁을 나눈 날이 유월절이었기 때문이고, 예수님은 유월절의 제사의식과 자신의 십자가를 연관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월절은 이미 유대인들이 지키고 있던 연례 절기입니다. 그것은 다시 강조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반면 사도 바울은 고전 11:17-21에서 ‘이것’을 ‘빵과 포도주’로 이루어진 성찬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일상적으로 먹던 식탁에 예수님께서 절기의 의미와 관련하여 자신의 십자가의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두 가지를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의미로서의 성찬식을 행하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기억하고 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의식은 함께 십자가를 지는 삶을 선택하겠다는 결단입니다. 또한 우리의 식탁을 거룩하게 변화시켜야 합니다. 섬김과 나눔이 있는 식탁을 결단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식탁이 아니어도 사람들은 식탁을 나누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제 성도와 교회가 나누는 식탁은 그 동기와 목적이 변화됩니다. 이전에는 식탁을 나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기쁨과 즐거움을 위해서 하는 것이었다면, 이제 예수님을 기념하고 순종하는 식탁은 동기가 예수님의 사랑이며 목적이 십자가의 영광입니다. 나의 즐거움을 위한 식탁의 나눔은 중지할 수 있고, 변질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이 동기가 되고 십자가의 영광이 목적이 되는 나눔은 중단할 수도, 변질될 수도 없습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주님의 우리를 위한 죽으심과 함께 교회와 성도의 식탁의 나눔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3. 식탁의 교제의 의미 그렇다면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공동체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식탁을 통해서 어떤 의미와 목적을 개발할 수 있을까요? 1) 깊은 교제 그것은 먼저 좀 더 깊은 교제에 목적이 있습니다. 성도의 식탁의 교제는 섬김과 나눔의 좋은 교제이면서 중요한 영적 훈련을 포함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섬기는 훈련을 하고, 공동체를 넘어서서 이웃을 공동체로 초청하기 위한 섬김과 나눔이 계속 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교제가 식탁의 섬김을 통해서 확장됩니다. 2) 기념과 섭취와 헌신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은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들입니다. 나아가서 공동체의 신앙 고백과 함께 하는 식탁은 주님의 우리를 향하신 섬김과 나눔을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공동체의 식탁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고 감사하면서 먹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섬기신 것같이 식물과 동물이 우리를 섬겨서 살이 되고 피가 됩니다. 음식으로 준비되기 위한 많은 사람들의 땀과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먹고 마신 우리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본을 따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우리가 섭취한 음식들처럼, 우리 또한 타인을 위한 ‘음식’이 되는 삶을 결단합니다. 우리의 나눔과 섬김으로 이웃이 생명을 얻는 귀중한 경험을 식탁의 나눔을 통해서 확인하게 됩니다. 나를 섭취한 그들로부터 어떤 보상도 기대하지 않는 헌신이 발생합니다.
3) 정체성을 확인하게 됨 우리가 무엇을 먹고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 내가 돈으로 산 것으로 내가 먹고 마신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내가 먹는 이 식탁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자 다른 사람들의 피와 땀의 결과물입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다른 사람들의 헌신과 노력을 나누고 있습니다. 내가 식탁을 준비하는 일에 참여했다고 해도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나의 헌신과 노력으로 준비한 식탁이 아니라 내가 받은 은혜와 사랑을 다시 한번 나누고 있다고 고백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됩니다. 공동체의 식탁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을 내려놓고 그리스도가 원하는 새로운 영적 문화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4.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식탁을 사모하면서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은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주님과의 동행은 가장 현실적으로 우리의 식탁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식탁을 단순히 먹는 것으로만 한정짓지 않는다면 우리는 공동체의 울타리는 넘는 다양한 나눔과 섬김의 삶을 통해서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동행하심, 그리고 교통하심을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은 교통의 영이십니다. 범죄와 타락으로 가로막힌 모든 관계의 벽을 소통으로 허무십니다. 고전 14:26에는 교회가 함께 모여 교제하고 예배할 때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바쁜 삶을 내려놓고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끼면서 공동체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의 삶의 경계를 넘어서는 교제를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식탁은 우리가 성령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통로가 됩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며 내가 받은 은혜를 나누며 섬기는 장을 실천하는 것은 아주 맛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열매를 나누는 좋은 길이 됩니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눅 14:12-14)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성도와 교회의 잔치가 계속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잔치가 나눔과 섬김이 사라진 세상의 문화를 변화시킬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동력화된 새로운 영적 문화를 전파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동행하심으로 날마다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