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하나님이 나의 증인 | na kim | 2016-01-18 | |||
|
|||||
[성경본문] 데살로니가전서2:1-6절 개역한글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감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2.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3.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4.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6.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그러나 너희에게든지 다른 이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
2016. 1. 13. 건강한 교회를 꿈꾸며/데살로니가 교회 3. 하나님이 나의 증인(살전2:1-6) 나는 감옥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죄인들을 가두고 그들의 악행으로부터 세상을 지킵니다. 얼마 전에 빌립보를 소란하게 한 두 사람이 잡혀왔습니다. 로마 제국을 해치는 신흥 종교를 전해서 성을 소란하게 했다는 죄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들에 대한 소문은 온 성에 퍼져있었습니다. 그들이 나타나자 이곳 빌립보에서 귀신이 들려 점을 치던 여자가 이상한 행동을 했고,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그 여자를 고쳤다는 사실 말입니다. 귀신들린 여자에게 점을 치게 해서 이익을 보던 사람들은 분노했고 그 두 사람을 잡아서 고문했습니다. 이미 많은 매를 맞아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두 사람을 나는 가장 깊은 감옥에 넣었습니다. 나는 감옥을 지키는 사람, 그들의 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차가운 어둠이 감옥에 출렁였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수십 년 감옥을 지키면서 처음 듣는 소리였습니다. 절망과 분노로 치 떨며 우는 울음소리여야 하는데... 다른 소리가 들렸습니다. 절망이 아닌, 분노가 아닌.... 분명 억울하고 분할텐데, 분명 고통스러울텐데, 분명... 분명히.... 한숨과 신음으로 잠 못이뤄야 할텐데.... 그 두 사람이 그들의 신의 이름을 부르며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밝고 건강한 노래였습니다. 정말 별난 사람들이라 생각했습니다.
얼마를 잤을까요? 갑자기 우찌끈 뚝딱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흔들렸습니다. 말로만 듣던 지진이었습니다. 번쩍, 뇌리를 스치는 단어는 ‘죄수들’이었습니다. 허겁지겁 감옥으로 뛰어갔습니다. 모든 문들이 다 열려 있었습니다. 어떻게 지켜온 내 인생인데.... 이제 망했구나 생각했습니다. 죄수들이 도망했다면, 그들에 대한 모든 책임을 내가 져야합니다. 차라리 내가 죽어 가족들을 지키는 것이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칼을 뽑았습니다. “여보시오. 멈추시오. 우리 다 여기 있소. 아무도 도망가지 않았으니 걱정 마시오.” 노래보다, 지진보다 더 놀라고 말았습니다.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노래하던 그 두 사람은 다른 죄수들을 위로하면서 열린 옥문 안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순간, 어쩌면 그들이 전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음보다 깊은 감옥에서도 기뻐할 수 있도록 만드는 소식, 인생의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믿음, 자신을 위해 안전한 길을 선택하기보다 자신에게 있는 믿음으로 좁고 험한 길 위에 설 수 있는 용기... 나는 어느새 두려움 가득 찬 마음으로 그들 앞에 엎드렸습니다. 내 인생을 붙드는 능력은 로마의 권력이 아닌 그들 안에 있는 새로운 소식에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그들은 내게 삶의 방향과 목표를 선포했습니다. 나는 그 날 밤 그들을 집으로 초청했습니다. 내가 들었던 소식을 내 모든 친족들에게도 전했습니다. 우리는 다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감옥을 흔들던 구원의 기쁨이 내 인생과 친족들에게 임했습니다. 다음 날, 그들의 누명이 벗겨졌습니다. 그들은 석방되었습니다. 하지만 나와 내 친족들은 사로잡혔습니다. 복음의 은혜와 능력이 우리를 사로잡았습니다. 우리는 빌립보 교회가 되어 그들이 우리에게 전했던 예수를 전합니다. 나는 여전히 감옥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죄와 악의 감옥입니다. 그들이 다시는 그 감옥에서 살지 않도록 해방의 복음을 전합니다. 나는 변화되었습니다. (행 16:16-40) 전도자의 고난(살전 2:2, 행 16:19-24) 바울의 전도의 여정은 결코 쉽거나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죽음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복음을 전해야만 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두 가지를 함께 자기 안에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환란’과 ‘기쁨’이었습니다. 물론 환란 자체는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환란을 받아야 할 이유와 목적은 바울에게는 큰 기쁨이 됩니다. 사도행전과 바울의 서신을 보면, 바울은 자신을 핍박하고 괴롭히던 사람들을 저주하거나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울에게 있어서 그들의 존재는 복음을 증거해야 할 중요한 이유와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환란은 그에게 복음에 순종하는 성도에게 허락하신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를 제자로, 전도자로 부르셨습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삶의 여정은 바울의 전도의 여정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여정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오해와 상처를 만나고 핍박과 고난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어려움은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밝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로 그 이유로 우리에게 복음이 필요하고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환란 중에 기쁨을 발견하고 있는 바울의 영적인 지혜와 믿음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 풍랑 인연 하여서 더 빨리 가는”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내면의 동기에 대한 점검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자기 안에 있는 내적인 동기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3절과 4절 상반절을 봅시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어떤 간사하고 더러운 의도나 남을 속이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전한 말씀의 뿌리가 하나님에게 있고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사명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는 것입니다. 내면의 동기에 대한 점검이 중요합니다. 어제 저는 가까이에 있는 비브리컬 신학교의 한인 학생회 개강 예배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좋은 목사님들이 오셔서 매주일 말씀을 전하시기 때문에 뭐 제가 특별히 대단한 말씀을 전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신학생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내면의 동기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지난 해 성탄절이 있던 주일에 여러분과 함께 나누었던 말씀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지고 죽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좋은 목회자가 되기를 꿈꾸며 준비하고 있는 많은 신학생들이 본인이 받은 사명에 대한 내면의 동기에 대한 정리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풍성한 열매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또 다른 씨앗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열매의 영광을 원하십니까? 씨앗의 헌신을 원하십니까? ‘한 알의 밀알’의 비유를 통해서 주신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질문은 “너희가 나의 씨앗이 될 수 있겠는가?”에 있다고 전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신학생 몇 분이 제게 와서 열매가 아닌 씨앗이 되라는 설교를 처음 들었다는 겁니다. 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지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만 생각했는데, 그 열매가 또 다른 씨앗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내면의 동기에 대한 왜곡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섬기고 헌신하고 수고하는 모든 내면의 동기가 점검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조차 우리를 위한 씨앗이 되시는데, 왜 우리는 고집스럽게 열매가 되려 할까요? 왜 우리는 십자가의 헌신보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먼저 누리려고 할까요? 세상이 우리의 내면의 동기를 계속 왜곡해놓기 때문입니다.
선교의 목적 헨리 나우웬은 믿음으로 살기로 결단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세 가지 함정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착한 사람 신드롬’과 ‘자기 의(義)의 결단’, 그리고 ‘경쟁적인 사고’였습니다. 그 모든 것의 초점은 결국 의로운 삶을 살기로 결정한 자신의 만족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백하고 선언합니다. “....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 2:4) 바울은 자신이 받은 모든 고난과 환란을 넉넉히 기쁨으로 이긴 근거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뿌리를 생각할 때입니다. 다윗의 고백과도 같이 오직 여호와만이 우리의 반석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우리들 모두에게도 이 고백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삶과 사역의 목적을 분명히 했으면 좋겠습니다. 때로 우리가 고민하고 방황하는 것은 그 목적이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그 길 위에 든든히 서 있는지 확인합시다. 사역과 삶에 기쁨이 계속 채워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증거하심을 바라보며 행 16장에서 우리는 중요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믿음을 증거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살전 2:5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고 헌신하되 자신의 이익이나 생각으로 일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증거해 주십니다. 옥문이 열리며 간수와 가족들이 복음 안에서 구원을 얻으며 빌립보 지역에 교회가 서고 그 교회로부터 로마를 향한 복음의 대로가 열리는 역사와 은혜가 바로 하나님이 드러내시는 복음의 증거가 됩니다. 우리는 당연히 교회와 세상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복음과 나라를 증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증거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증명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의 증거하심을 믿음으로 기다리며 사모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아주 대단한 고백을 하나 합니다. 십자가의 증인으로 사는 자신의 삶과 믿음에 대해 증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바울의 삶과 믿음의 증인일까요?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 ) 하시느니라”(살전 2:5)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 )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롬 1:8-10) 하나님이 우리의 헌신과 수고에 대한 내면의 동기를 증언해주시면 얼마나 확실할까요? 우리의 믿음과 삶의 증인이 되는 삶, 그런 성도와 교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바울의 이 고백이 우리들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