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 ! | na kim | 2016-02-2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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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데살로니가전서4:1-12절 개역한글1.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2.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4.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5.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6.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 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8.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9.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10.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 11.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12.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2016. 2. 17. 건강한 교회를 꿈꾸며/데살로니가 교회 7.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살전 4:1-12) 지진은 로마의 티투스 황제가 집권한지 한 달이 지난 서기 79년 8월 24일 아침에 작되었다. 베수비오산 정상에서부터 시작되어 나폴리만으로 내려오면서 그 때까지는 단순히 여기저기 농가와 포도밭으로 찼던 한 산이 검은 연기를 뿜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드문드문하던 진동들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잦아졌으며 나중에는 계속된 진동으로 산꼭대기에서는 불꽃을 튀기면서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 화산 폭발의 시작은 10세기가 넘도록 활동을 멈추었던 기존의 화산구 함몰지역에서 새 분화구가 터지면서 아침 내내 계속되었다. 오후 한 시, 갑자기 베수비오는 굉음과 함께 수 킬로미터의 경석 기둥을 분출시키며 산꼭대기로부터 큰 소나무 모양의 엄청나게 큰 먹구름을 형성했다. 갑자기 온 세상이 깜깜해졌고 남동쪽으로 바람이 세차게 불어갔으며, 먹구름은 지표면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첫 번 굉음 후 반 시간이 지나자 재와 경석더미 위로 힘차게 퍼붓기 시작했다. 에르콜라노에서 쏘렌토 해안선 지역과 사르노 유역 안쪽, 남쪽으로는 파에스툼까지의 지역이 피해를 입었으나 그 중 가장 피해가 심한 곳은 폼페이었다. 폼페이는 사르노강 하구 화산의 경사지역에 위치한 도시로 약 17년 전, 즉 서기 62년 이미 지진을 겪었던 곳이다. 이 천재지변은 로마제국의 가장 비옥하고 아름다운 지역 중의 하나였던 곳을 파괴하였다. 로마는 이 지진을 공포와 긴장으로 맞아들였고, 원로원은 피해복구를 위해 구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그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이란 단지 남은 사람들을 지진의 피해가 없었던 지역으로 피신시키는 일이었을 뿐, 그 밖에는 그다지 큰 해결책이 없었다. 후에 몇 명 사람들이 우물이나 굴을 파서 매장된 보물이나 재산을 찾아보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지만 이것도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근처에 목자들과 농부들의 오막살이가 몇 채 들어서기도 했고, 화산의 비옥한 토지 경작을 위한 농가, 별장도 생겨났지만, 바로 그곳 폼페이와 에르콜라노 그리고 스타비아에는 세월이 흘렀고 그 때 그 사건은 기억하는 사람들 역시 세월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폼페이의 유적 발굴은 우연에서 시작되었다. 1860년 고고학자 피오넬리 교수가 플리니우스의 직필인 듯한 문서를 발견했다. 문서에는 이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기원전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에 전대미문의 대분화가 일어났다. 거대한 불기둥과 연기가 하늘로 치솟아 산의 상반 부분은 휙 날아가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용암이 화구에서 흘러내려서 산록의 폼페이와 에르콜나노는 순식간에 멸망했다. 살아남은 주민은 거의 없었다." 단서를 잡은 피오넬리 교수는 이탈리아 정부의 원조를 얻어 폼페이 발굴을 시작했다. 거대한 대경기장의 일부, 로마의 귀족과 부자들이 휴가를 즐기던 별장의 유적을 비롯하여 사원, 저택의 문, 목욕탕, 극장, 장터 그리고 공회당 등등의 건물 유적들은 거의 옛날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심지어는 빵가게 앞에는 현재의 우리들이 먹는 것과 똑같은 고대의 빵이 80여 개나 화석으로 되어 있었다. 번화가의 네거리에는 육교도 있었고 산 채로 잿더미에 묻혔던 폼페이 사람들의 해골과 뼈도 나왔다. 또 여인들의 화장 도구며 꽃병, 촛대, 그릇 같은 것들도 나왔다. 그런데 교수는 발굴 도중 이상한 것을 알게 되었다. 문헌에 의한 인구에 비해 거의 시체가 나오지 않는 모순된 점을 말이다. 골몰해 있던 교수는 마침 화산재에 뒤덮인, 인간의 형태를 한 동굴을 발견했다. 교수는 이 동굴에 녹인 석고를 흘려 넣고 굳어지자 석고 주위의 화산을 조금씩 깨뜨려 나갔는데 그 곳에서 하나의 석고 덩어리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미모의 벌거벗은 여자였는데 육체와 시간이 함께 썩어 분해해서 생긴 일종의 주형이었다. 석고상은 희생자의 표정뿐 아니라 옷의 주름이나 헤어스타일까지 완전히 보여주므로 그들의 직업과 건강 상태까지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석고상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괴롭고 고통에 빠져 있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상은 서기 79년, 로마에서 가장 번영했었지만 화산 폭발과 지진으로 사라진 도시 폼베이에 관한 기록입니다. 비극의 도시 폼베이는 ‘폼베이 최후의 날’이라는 소설과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로마의 문화 바울이 선교하던 시대는 도덕적으로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타락했습니다. 특히그들은 성적인 방종을 이상하게 보지 않았습니다. 전 국민의 수보다 많은 노예들이 힘든 일을 다 해 주었기 때문에 로마의 시민들은 풍족한 여가 시간을 즐기면서 육체의 쾌락을 충족시키는 일이라면 선과 악을 묻지 않고 탐닉했습니다. 가정 파괴, 불륜과 매춘, 동성애나 짐승과의 성관계까지 그들이 선택하는 성적 타락의 수준은 오늘날의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이런 문화와 행위를 악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 밖에 없었습니다. 철학자도, 정치가도 성적 쾌락과 타락을 하나의 생활 문화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교회 안에도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이전의 삶의 습관을 버렸다고 말했던 사람들이 여전히 그 삶의 틀 속에서 살고 있거나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어떤 사람들은 로마와 그리이스 철학으로 기독교를 이해하고 자신들에게 맞게 가르침을 변화시키려고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초대 교회의 사명은 외부적으로는 적극적인 선교에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바른 가르침으로 성도들을 교육하고 이단의 사상과 타락한 사회의 문화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는데 있었습니다. 종말로 형제들아!(4:1-2)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현재의 신앙생활을 대체로 칭찬했었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그들이 배우고 성장해야 할 것들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종말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신앙과 경건하지 못한 삶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종말을 믿었지만 그들의 실제의 삶을 성도답게 살지 못했습니다. 종말에 대한 개념과 그들의 현실적인 삶을 잇는 ‘신학’을 바르게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먼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원칙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라는 원칙입니다. 삶이 중심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에 모든 선택의 순간 가장 중요한 기준과 원칙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예수를 믿기 전에 모든 로마의 시민들이 그러했듯이 자신의 쾌락과 즐거움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이 임했습니다. 복음은 그들의 삶의 원칙에 도전합니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살 것인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살 것인가? 그들은 고민해야 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4:3-8)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가장 시급한 교훈을 줍니다. 2절에서 그것은 ‘명령’이며, 3절에서 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거룩함’입니다. 단순히 종교적 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 외에 아무도 거룩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잘 표현한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에게 주어졌습니다. 범죄 이후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 시에 허락하셨던 거룩함을 상실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함에 동참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십니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것임으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본받는 삶을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거룩을 연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이 앞서 제시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따라 사는 삶’은 충분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와 교회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가고 거룩하심을 닮아갈 때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구체적인 삶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3-6절에서 바울의 권면은 그들이 실생활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바울은 그들이 속한 당시 문화로부터 벗어난 성도들이 될 것을 가르칩니다. 음란과 부정과 색욕과 행악을 금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3-5절에서 사도 바울이 많은 부분 성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로마의 문화는 성적인 방종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6절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욕망, 자신의 소원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치기까지 하는 악한 삶을 살지 말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려 주심이니라” 바울이 왜 이것을 가르쳐야 할까요? 그것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상 문화의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문화로부터 구별된 삶을 살아애 하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더 많이 하라.(4:9-10)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들의 부족함에 대한 첫 가르침을 주고 난 다음, 오히려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그들의 “형제 사랑에 대하여는 아무런 가르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다른 교회를 섬기는 일에도 최선을 하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에는 다함이 없습니다. 늘 더 많은 사랑의 의무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에 넘치는 사랑을 실천하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한편으로는 칭찬을, 다른 한편으로는 더 큰 사랑을 독려합니다. 구제와 선교에 대한 교회의 성경적 입장은 바로 이것입니다. “더 많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이웃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임을 기억합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헌신하는 삶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따라 사는 성도와 교회가 되기 위해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이 선택해야 할 믿음과 삶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첫째 세상의 문화가 아닌 하나님의 거륵하심을 따르는 삶에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 더욱 많이 섬기고 더욱 많이 사랑하는 삶에 있습니다. 그 원칙은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에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우리의 삶을 통해 실천되는 교회, 허락하신 은혜와 사랑을 더 많이 나누고 헌신하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기쁨과 즐거움이 교회에 늘 함께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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