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견고한 교회, 건강한 성도 | na kim | 2016-05-17 | |||
|
|||||
[성경본문] 데살로니가후서2:13-17절 개역한글13.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14.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5.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17.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2016. 5. 4. 건강한 교회를 꿈꾸며/데살로니가 교회 14. 견고한 교회, 건강한 성도(살후 2:13-17)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 봄부터 소쩍새는 /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내 꽃잎이 피려고 / 간 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고등학교 때 국어를 가르치셨던 ‘추봉(秋峯)’이라는 호를 쓰시던 국어 선생님은 이 시를 국화라는 작은 한 송이의 꽃의 개화를 전 우주적인 생명의 섭리에 연결한 명시라고 했습니다. 잎이 지는 가을날 한 송이의 국화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면서 지난 봄날 울고 또 울었던 소쩍새와 하늘이 무너지듯 내렸던 여름의 소낙비와 평생 잔물결 같은 삶을 말없이 살아온 시인의 누님을 함께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꽃은 그저 꽃 한송이가 아냐. 나무도 그냥 나무는 아니지. 저 한 송이 꽃 속에 충만한 있는 우주의 진리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시인이 될 수 있는 거야.” 얼굴에는 여드름이 가득했고 마음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던 시절,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다 알지는 못해도 무엇인가 꽃 하나에 크게 아름다운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습니다. 시인의 마음을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그의 꽃에 대한 이야기를 마음에 담아 두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허락된 본문을 읽으면서 이 시가 생각났습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전 우주가 함께 땀 흘렸던 것처럼 한 성도의 구원을 위해, 한 교회의 성장을 위해 과연 어떻게 하나님이 일 하시며 주의 일군들이 일하고 있으며, 그리고 자기 스스로가 노력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준비, 그리고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기도와 노력이 함께 합니다. 구원의 놀라운 진리가 우리의 신앙생활에 함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감사 – 하나님의 택하심에 대하여(2:13)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살후 2:13) 성경은 성도의 구원과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언제나 잊지 않습니다. 구원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아래 있습니다. 사람이 변화시킬 수 없고 사람이 포기하거나 버릴 수 없으며 사람이 스스로 구원의 반열에 오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그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 진리와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거듭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 교회가 거짓 교사들과 핍박으로 연약해지고 흔들리고 있지만 그들을 택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구원의 여정을 신실하게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변치 않으시는 신실함을 알기 때문에 바울은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어떤 힘에 근거한 구원을 소망하거나 주장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입니까? 자기 자신 조차도 신뢰할 수 없는 얇은 얼음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우리 자신을 구원의 근거로 삼는다는 것은 스스로 자멸하는 길과도 같습니다. 변치 않으시고 다함이 없으신 하나님께 우리의 구원의 근거를 두고 신뢰하고 의지하는 마음으로 믿음의 길을 걷는 것이 건강하고 든든한 교회와 성도가 되는 길입니다. 복음의 일꾼들(2:14)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4) 성도와 교회의 구원의 여정을 위해 하나님이 준비하신 도구가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입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과 그 동료들이 전하는 복음으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부르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통로요 도구로서의 성도와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엡 5:1에서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하지만 고전 11:1에서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그들에게 그 복음을 전하는 일꾼들의 신앙과 삶을 본받고 영향을 받아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쌍방간의 중요한 의무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성도와 교회가 복음 전하는 자들의 신앙과 삶을 전승하고 발견시켜 나가야 함과 동시에 복음의 일꾼들은 스스로 본이 되고 하나님의 자랑이 되는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은 히브리서 6:11-12에서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않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 받는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본 받고 본이 되는’ 의무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와 성도의 의무이자 사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살후 2:14에서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라는 말씀에 담긴 놀라운 의미를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과 인격을 그리스도의 복음의 도구로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의 삶의 견고함(2:15)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살후 2:15)
마지막 때에 교회와 성도들을 시험하는 사탄은 성도들의 두려움과 근심을 자극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복음과 일꾼들의 가르침보다 무엇인가 확실하고 든든해 보이는 것을 붙들고자 합니다.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부르짖는 기도와 시간, 장소에 대한 집착은 그들의 신앙이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감격과 감사보다 두려움과 염려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거짓 교사들의 종말론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견고하게 설 수 있는 반석이 무엇인지를 가르칩니다.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15절에서 그들에게 가르쳤던 모든 진리 위에 견고하게 설 것을 권면합니다. 아직 성경이 완전히 완성되지 않았던 시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직접 받고 전했던 사도들의 가르침에 집중하고 그 가르침에 근거하여 믿음 위에 굳게 서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시대가 혼란할수록 우리의 마음의 근거가 불안정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무엇에 우리의 마음의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까? 그것은 혹시 사람, 재정, 관계, 명예나 즐거움은 아닙니까? 외적인 핍박과 내적인 거짓 가르침에 흔들리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성경적 처방’에 귀 기울입시다. 흔들릴수록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4.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 하실 일(2:16-17)
우리는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값없는 은혜로 구속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훌륭하고 존경스러운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만 하면 늘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낙심하고 시험에 빠지고, 너무 쉽게 분노하고 절망하는가 하면, 너무 쉽게 두려움과 염려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마지막 일 하나를 소개합니다. 2:16-17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2:16-17)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를 굳건하게 하시면서 그 구원의 과정을 하나님의 은혜와 일꾼들의 수고와 교회와 성도 자신들의 헌신과 노력으로 설명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부족한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와 성도들은 언제나 연약하고 언제나 흔들리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위로와 사랑과 격려하심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믿음을 격려하시며 ‘모든 선한 일과 말이’ 우리의 삶 속에서 견고하게 성장하도록 도우십니다. 서정주 시인은 한 송이 국화꽃을 보면서 소쩍새와 천둥과 누님과 잠 못 이루는 밤을 노래했습니다. 늦은 가을의 국화꽃 한 송이는 그저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봄부터 여름을 지나 가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땀과 노력과 눈물과 한숨과 그리고 소원이 함께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보다 더 아름다운 시가 있습니다. 마 6:26-30을 봅시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6:26-30) 성도와 교회는 늦가을의 국화꽃보다, 들의 백합화보다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고도 귀합니다.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있었습니다. 성실하신 하나님은 단 한번도 교회와 성도를 향한 열심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교회와 성도를 지키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지금도 교회와 성도와 함께 하시면서 때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지키시고 때로는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으로 교회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견고한 교회로, 건강한 성도로 자라가는 것은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소원이요 세상 끝날까지 하나님의 계획하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과 은혜를 늘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사랑과 은혜 속에 살아갈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의 구원의 여정이 날로 견고해 질 것입니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