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하나님이 만드신 새로운 사회 | na kim | 2016-07-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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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에베소서2:11-12절 개역한글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2016. 7. 6. 초대교회 수요예배 / 에베소서 강해 3.하나님이 만드신 새로운 사회(엡 2:11-22)
엡 2:14에서 우리는 담을 만납니다. 견고하고 높았던 담, 그 이름은 이방인의 담이었습니다. 그 담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이를 수 없는 담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구별을 상징하는 담이었습니다. 이 담은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담이었습니다. “이 벽을 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라고 하는 섬뜩한 경고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 담이 무너졌다고 선언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16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원수된 것’이 십자가의 은혜로 소멸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졌습니다. ‘동일한 시민’이 되고,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관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만들어지고 새로운 사회가 건설되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유대사회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하나님이 만드신 새로운 사회, 에베소서 2장은 그 새로운 관계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 세 단계가 있다면 11,12절의 ‘그 때에…’와 13절의 ‘이제는...’ 19절의 ‘그러므로 이제부터...’입니다. 전체 말씀을 요약하면 “그때에 너희는 소외되어 있었음을 기억하라...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가 가까워 졌나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라.”입니다. 한 단계씩 그 의미를 찾아봅시다.
1. 우리의 과거 - 소외(疏外/2:11-12)
‘소외’라는 말을 가장 먼저 보편화시킨 사람은 칼 마르크스였습니다. 그는 생산수단과 결과물로부터 소외당하고 오직 노동력만 제공하는 노동자 계급의 소외를 강조했습니다. 나아가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소외 받고 있음’을 괴로워하고 슬퍼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소외라는 말은 현재 상태에 대한 불만족을 의미할 수도 있고 한 조직 속에서 그러한 불만족을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력에 대한 감정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소외의 개념을 일찍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사용하는 소외의 개념은 본질적인 두 가지 관계에서의 소외에 대한 것입니다. 그 첫 번째는 창조주의 사랑과 은혜로부터의 소외요, 두 번째가 인간들 상호간의 관계 속에서의 소외를 말합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는 이 두 가지 소외를 함께 언급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전반부(1-10)에서 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의 소외를 언급했던 바울은 이제 11-22에서 서로를 소외시키는 현상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이러한 소외의 대상은 이방인었습니다. 그들은 5가지 소외를 당했습니다. 1)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2) 이스라엘 나라로부터 소외되었고, 3) 약속의 언약에 대하여 외인이었고, 4) 소망을 가질 수 없었고, 5) 하나님도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의 상태를 13절에서 ‘멀리 있었다’라는 말로 정리합니다. 그리고 ‘생각하고 기억할 것’을 권합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전에 그들은 복음에 대하여, 구속에 대하여, 은혜에 대하여 철저하게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오직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고 끝까지 참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소외를 넘어서서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
2. 우리의 현재 - 소외의 극복, 화평케 됨(2:13-18)
13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거리’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전에는 멀리 있었다...‘(13)라고 말합니다. 구약에서는 ‘거리’를 나타내는 말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신 4:7에서 모세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 148:14에서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친근히 하심을 받은 백성으로 언급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방 족속들은 멀리 있었습니다.(사 49:1/섬들아 내게 들으라 먼 곳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따라서 그들은 특별한 부르심을 받아야 하나님 앞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거리가 극복되었습니다. ‘가까워졌습니다.’(13) ‘담을 허셨습니다.’(14) ‘화평케 하셨습니다.’(15)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16) ‘평안을 전하셨습니다.’(17)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18) 성경은 매 구절마다 극복된 거리와 무너진 담에 대해 말씀합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할까요?
14절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요약합니다. ‘파괴와 건설과 보존’입니다. 예수님은 막힌 담을 허시고 둘로 하나를 만드셔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에베소서가 사용하는 세 동사, ‘폐하셨으니… 창조하고… 화해하게…”를 통해 예수님의 사역을 자세하게 살펴 봅시다.
1) 파괴 - 율법을 폐하시다.(2:15)
John Stott는 2:14에서의 담을 ‘적개심’의 담으로 규정합니다. 15절에서는 그 담이 무너졌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 대해서 가졌던 적개심의 담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들은 왜 이방인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만이 가졌던 율법에 대한 우월감 때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종종 “율법이 없는 자들”이라는 말로 이방인들을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이 그들을 성별하는 표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나 예수님은 모든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심으로 인류를 얽매고 있던 율법의 굴레를 깨뜨리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2) 건설 - 새 사람을 지으시다.(2:15)
15절 하반절을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둘을 하나의 새사람으로 창조하시어 화평하게 하셨다.”입니다. 골 3:11(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과 갈 3: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라고 하는 구별은 이제 무의미합니다. 오직 하나의 구별이 있을 뿐인데 그 구별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 새사람이기 때문입니다.
3) 보존 - 화평케 하시다.(2:16)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 지으심을 받은 우리는 비로소 참된 평화를 만날 수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나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화평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은혜가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존하시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입니다.
3. 우리의 미래 - 하나님이 만드시는 새로운 사회(2:19-22)
개정 개역 성경에서 ‘그러므로’라고 번역된 19절의 서두는 ‘그렇다면’으로 번역되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화평을 전하시고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우리들은 “그렇다면 과연 어떤 신분이요 어떤 존재가 되는가?”하는 것을 설명합니다. 성경이 부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닙니다. 법적인 권리가 없는 나그네도 아니요 외국에 있는 낯선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분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입니다.(2:19)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시민권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그에게 있어서 더 중요한 시민권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사실입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2:19)
많은 시편에서 시인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이방인들은 이 범주에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모든 이방인들에게 열려진 새로운 가족관계를 선언합니다. 복음 안에 있는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가족이 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됩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에베소서에서 특별히 앞선 두 가지보다 강조해서 설명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에베소 교회와 이방 성도들이 ‘성전이 되어간다’는 개념입니다. 이전에는 들은 적이 없는 새로운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이 개념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십니다.
4. 우리는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2:21-22) 다행인 것은 이 성전은 ‘지어져가는 성전’입니다.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좀 부족해도, 좀 연약해도 위로를 찾을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한 사람 성도의 삶이 그러하고 함께 모인 교회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서로 연결하여 되어가고 지어져갑니다.. 이 성전의 기초는 어디에 있을까요? 20절에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이라고 번역해도 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성전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고백하고 배우고 다시 교회를 가르친 제자들의 증거가 교회의 기초가 됩니다.
모퉁이 돌이란 원래 기초의 일부이자 가장 중요한 기초 자체입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전체 건물의 위치와 배열이 결정됩니다. 20절에서 이 성전의 모퉁이돌은 ‘그리스도 예수’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21절에서는 ‘예수 안에서 모든 구조가 함께 결합되고 또한 이루어져간다’고 말합니다.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역할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어진 성전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간섭하심,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시는 처소가 되는 것이 성전의 건축 목적이라 하겠습니다.
다만 현재 각 성전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성도와 초대교회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현실은 온전히 하나님의 처소가 될 만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에베소서는 그들의 이런 상태에 대해 재미있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지어져 가느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성전의 삶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역동적으로 웅변하는 우리의 신분의 변화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 말씀이 2000년 전 에베소 교회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함께 적용되는 말씀임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지어져 가는 성전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 함께 지어져가고 세워져 가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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