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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부모와 자녀, 주님 안에서(6:1-4) na kim 201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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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9. 21. 교사 헌신예배 초대교회 수요예배 / 에베소서 강해

 

11. 부모와 자녀, 주님 안에서(6:1-4)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맡기신 가장 중요한 사명 중 하나는 다음 세대를 위한 헌신입니다. 큰 책임이 교사에게 있고 그리고 부모에게 있습니다. 교사 헌신 예배를 들면서 함께 다음 세대에 헌신하는 부모가 자녀를 어떻게 만나야 하며, 자녀들 또한 어떻게 부모를 섬겨야 하는지를 말씀을 통해 나누려고 합니다.

상담을 요청하는 부모들이 자녀들에 대해 제기하는 문제들은 거의 비슷합니다. 다음의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부모들은 자녀의 문제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니 외면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만 하다가 피곤하게 집에 돌아와서 자녀와의 접촉을 가질 수 없는 부모들이 쉽게 이런 위험에 빠집니다. 자녀가 크게 말썽을 일으키지 않고 학교에서 그럭저럭 성적을 받아오는 것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날 자녀의 삶에서 심각한 문제를 만나고 당황하거나 분노할 때는 이미 늦습니다. 자녀는 회복하기 힘든 상처와 고통 속에 있고 부모와의 관계의 회복 또한 멀고 힘듭니다,

 

어떤 부모님들의 경우 자녀의 외적인 성장과 내면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 아들은 원래 착하고 공부도 잘하는데친구 때문에환경이 좋지를 않아서그 놈의 컴퓨터 때문에여자를 잘 못 사귀어서등등의 변명과 원망을 반복합니다. 이사를 하기도 하고, 학교를 바꾸기도 합니다. 자신들의 자녀가 나쁜 것이 아니라 환경의 문제라고 해석합니다. 이런 경우 부모님들은 상담에서 좋은 결과를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부모님이 상담자 앞에서 자녀를 변호하기에 급급하기 때문에 상담자가 자녀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문제에 접근하고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자녀의 연약함이나 부족함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녀석이 내 아들로 태어났는지 알 수가 없어요. 우리 가문에 그런 녀석은 없어요.” “도대체 내가 낳은 자식이지만 이해가 안돼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부끄러워서 친척들을 만날 수가 없어요.” “우리 집안에 그런 수준의 학교에 들어가는 녀석은 그 녀석 밖에 없어요...” 특히 부모님이 좋은 학벌과 사회적 성공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경우 자녀를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의 경험과 성공의 안경을 끼고 자녀를 봅니다. 자녀는 부모의 시선을 피해서 자신의 안식처를 부모 밖에 있는 세상에서 찾게 됩니다.

 

이런 유형의 부모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님이 자녀를 아직도 독립적인 인격으로 보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자신에게서 독립시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신 또한 자녀에게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자녀의 성공을 통해서 자신의 삶의 성공과 가치를 확인하고 자녀가 실패한다고 생각되면 분노하거나 외면하거나 비난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문제들이 불신자의 가정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신앙의 유무와 관계없이 많은 가정들이 이 문제로 고통당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와 복의 관계 - 부모와 자녀, 어떻게 하면 고통과 눈물이 아닌 기쁨과 감사로 회복될 수 있을까요?

 

1. 자녀들에게 순종하라!

 

에베소서 6장은 5장에 이어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에 복종하라’(5:21)는 말씀을 부부의 관계가 아닌 자녀와 부모 사이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부부의상호복종복종과 사랑으로 적용되었다면 부모와 자녀의 관계 속에는 어떻게 적용될까요?

 

자녀들은 먼저 부모에 대해 순종해야 합니다. 세 가지 측면에서 순종해야 할 근거를 제시됩니다.

 

이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아주 심플하게 말합니다. 이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모든 문화에서도 부모에 대한 공경은 보편적인 가치로 인정됩니다.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것이 왜 옳은지를 가르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해야 할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출 20:12(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와 신 5:16(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을 연결하여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부모 공경의 계명을 주시고 그 말씀을 지키는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해 큰 은혜와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4계명까지를 하나님에 대한 계명, 5계명부터 사람에 대한 계명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각 계명을 다섯 개씩 배열하여 좌우에 두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 5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계명과 같은 돌 판에 새겨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신적인 관계로 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첫 번 째 돌판에 함께 새긴 것입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주님 안에서 순종해야 합니다.

 

골로새서에서는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3:20)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에서는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되 그 기본적인 틀을 소개합니다. 모든 일에 순종하되 그 모든 일이 주 안에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부모를 순종하는 원칙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를 함께 의미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주 안에서의 순종이라는 말씀을 지나치게 방어적으로 해석했습니다. 부모와 자녀가 신앙이 다를 때 부모의 비신앙적 요구를 거절할 수 있는 근거로 설명했습니다. 물론 크게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주 안에서...’라는 말씀은 순종할 수 없는 일에 대한 경계를 만듭니다. 하지만 주 안에서라는 말씀은 좀 더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얼마만큼 순종할 것인지를 가르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521, 24, 25, 29절에서 상호복종의 다양한 의미를 설명하면서 계속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왜 당시 사회적 규범과는 다른 방식으로 부부가 서로를 섬겨야 하는가 하면 그 사이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왜 자녀가 부모에 대해 무한 순종해야 하느냐 하면 바로 주님께 받은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고르반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부모 공경의 한계를 스스로 정하려고 했습니다. 율법은 남았으되 기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부모를 순종하는 것은 단순한 의무이거나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기쁨으로 섬기는 것이요 그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3:20)이라고 가르칩니다.

 

2. 부모에게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의 로마 사회에서 아버지는 자기 식구들에 대해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귀족들은 신분이 다른 많은 아내를 거느렸고, 자신의 자녀를 노예로 팔아넘길 수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마음에 들지 않는 아들을 사슬에 묶어서 자기 농장에서 일하도록 만들 수도 있었으며, 거부하거나 저항하는 자녀을 벌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자기 자식에게 사형을 가할 수도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권력이 수백년을 지속되면서 사회 전체가 지극히 가부장적인 권위로 뭉쳐져 있었고 교회 내에서도 이런 가부장적인 권위의 잔재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에게 혁명적인 부자 관계의 개념을 전합니다. 그들은 모두 한 아버지의 자녀라는 것입니다.(3:14-15, 4:6)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모든 부모와 자녀는 이제 로마의 상식과는 다른 새로운 관계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주 안에서 자녀와의 새로운 관계 속에 들어간 부모들에게 두가지 권면을 합니다.

 

소극적 교육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일들로 말미암아 부모들이 자신의 권세를 오용하기 쉽다는 사실이다. , 어린애들이 아직 미숙해서 감당할 수도 없는 힘들고 불합리한 요구를 하는 일, 또는 거칠거나 난폭하게 대하든지 아니면 그와 정반대로 지나치게 편애하거나 방임해버리는 일, 또는 그들에게 창피를 주거나 억누르는 일, 또는 비꼬아서 웃어넘기는 일 등이다. 바로 이러한 일들이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만드는 태도의 일부인 것이다.”

 

John Stott는 그의 에베소서 강해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부모의 권세는 인간의 이런 부족함과 연약함 때문에 억제되고 제한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의 어리석음의 가능성 반대편에는 자녀의 독립적인 삶과 인격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The Better Way라는 책을 쓴 Sir Frederick Catherwood는 부정적인 자녀와 부모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던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에서나 나오는 그런 권력형의 아버지는 패역한 아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의 권세를 주장할 아무런 자격이 없다. 전자는 권세를 남용하고 후자는 그것을 비웃고 있다. 그 둘 다 잘못이다.” 부모로서의 권위의 남용과 그것에 대한 자녀의 조롱 가정에서 이것만큼 비성경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성경이 가정을 통해서 의도하는 바는 남편과 부모의 권위를 통해서 하나님을 느끼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남편의 권위가 남용되거나 조롱되고 부모의 권위가 역시 남용되거나 조롱될 때 그 가정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할 수 없게 됩니다.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해 바울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2) 적극적인 교육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그렇다면 과연 자녀를 어떻게 양육해야 할까요? 본문은 성도의 가정의 교육의 원칙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주의 교양과 훈계입니다. 로마인들에게는 그들만의 상식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들만의 교양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교회와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교양과 훈계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이미 새로운 사회의 구성원이 되었고, 이 새로운 사회의 가정교육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부모를 공경하되 주 안에서공경하고, 자녀를 양육하되 부모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로운 삶과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에 공부한 남편과 아내의 새로운 관계, 그리고 이번 주에 공부한 부모와 자녀의 관계, 다음 주에 공부할 종과 주인의 관계 이 모든 관계를 새롭게 조명함에 있어서 공통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주 안에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음을 받은 새 사람입니다. 새로운 관계 속에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정의 주인이 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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