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정사와 권세에 대하여 | na kim | 2016-10-0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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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9. 5. 초대교회 수요예배 / 에베소서 강해 13. 정사와 권세에 대하여(엡 6:10-20) 최근 한국에서 선거를 할 때마다 일정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정당이 있습니다. ‘기독’이라는 단어를 붙인 정당들입니다. 지난 총선에서는 3-4개 정도의 기독교 정신을 표방하는 정당들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다행인지, 아니면 불행인지...단 한 석도 얻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오랫동안 교회는 세상의 권력과의 관계에 대해 논쟁해왔고 때로는 비판과 저항의 자리에, 때로는 찬성과 지지의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과연 세상의 권력과 교회는 어떤 관계 속에 있을까요? 신약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엄청난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런 상황 속에 있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가장 성경적인 입장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회, 누구와 싸울 것인가?(6:10-12) 모든 싸움에서 그러하듯이 싸워야 할 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와 성도의 적은 과연 누구입니까? 1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고 했습니다. 이제 적은 분명해졌습니다. 성도와 교회의 적은 그 본질상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그 적들의 힘은 아주 강합니다. 그것은 정사와 권세라는 말로 표현될 만큼 세상의 권력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 다가와 ‘세상의 모든 권력’을 주겠다고 유혹했었습니다. 본문 12절에서 그들을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헬라어에서 ‘주관자들’이라는 말은 ‘운명을 결정짓는 어떤 힘’ 정도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미 이 세상은 그들의 논리와 세계관으로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결정하면 세상은 그곳으로 달려갑니다. 그 힘은 이미 강한 것입니다. 2) 그들은 사악합니다. 그 영들의 본질은 ‘악’입니다.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어두움’이 그들의 이미지입니다. 3) 그들은 교활합니다. 성경은 ‘마귀의 궤계’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저 단순히 ‘책략’, ‘작전’ 정도가 아닙니다. 비겁하고 교활하며 수단을 가리지 않는 적극적인 모습, 그것이 성도와 교회가 싸워야 할 악한 세력의 특징입니다. 2. 정사와 권세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의 악의 영들에 대해서는 우리는 논란의 여지가 없이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로 표현된 사탄의 구체적인 모습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사와 권세’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논쟁이 있어왔습니다. 과연 성도와 교회가 싸워야 할 정사와 권세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많은 신학자들은 정사와 권세를 ‘사탄의 인격적인 모습’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탄압하고 인류에 큰 해악을 끼치는 사람이 역사에 등장하면 ‘적그리스도’로 지칭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현대 신학자들 가운데서는 그것이 꼭 인격적인 모습을 띨 필요는 없다는 주장이 많습니다. 한 시대를 이끌어가는 사상이나 사회적 구조, 국가와 그 제도 속에서 구현되는 사상 구조들(전통, 인습, 법, 특정한 권위들, 종교)이 정사와 권세의 구체적인 모습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사와 권세는 때를 따라 사탄의 영감을 받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 하면 때로는 사회 제도와 법, 혹은 정치권력으로 형상화될 수 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3. 어떻게 싸울 것인가?(6:10-12) 사탄의 사악함과 강력함에 대해 교회와 성도가 준비해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주 예수의 힘과 능력과 강건함’을 입어야 합니다.(10절) 엡 1:19(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에서 먼저 이것에 대하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와 성도는 그리스도를 힘입어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이것은 내적인 준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이것을 계속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또 하나 중요한 준비가 있다고 말합니다. 교회와 성도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12) 이 갑주는 하나님이 은혜로 허락하신 것으로 사탄의 세력과 싸우기 위해 반드시 준비해야 합니다. 4.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6:13-20) 성도와 교회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고’(11) ‘악한 날에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13)’입니다. 전신갑주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아마도 오랫동안 호송을 당하고 감옥에 갇혀 있었던 바울은 로마 병정들의 갑옷을 관찰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 갑옷을 입고 세계를 정복하며 불패의 신화를 만들었던 로마의 병정들처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사탄의 모든 세력을 격파하는 통쾌한 장면을 상상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형상화하고 있는 전신갑주를 함께 생각해 봅시다. 진리의 허리띠(14) 로마의 장병들에게 있어서 허리띠는 갑옷 안에 옷을 동이며 칼을 찰 수 있도록 만 들어진 가죽띠였습니다. 갑옷을 입기 전에 스스로를 단단히 준비하는 마지막 단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진리는 성도를 준비시키고 동여매는 역할을 합니다. 허리띠 없이 갑옷을 입을 수도, 검을 찰 수도 없는 것처럼 진리 없이는 성도가 싸움을 준비할 수 없습니다. 의의 흉배(14) 로마 병정들의 흉배는 가슴과 등을 적들의 창과 활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왜 ‘의'를 가슴과 등을 보호하는 흉배로 형상화했을까요? 핀들리(G.G. Findlay)라는 신학자는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완전한 용서와 의롭다 하심을 입은 후의 삶에 속하는 성결한 품성이 함께 짜맞추어져서 뚫을 수 없는 갑옷이 된다’고 했습니다. 사탄의 가장 큰 무기는 우리의 죄책감과 자존감에 상처를 입히는 것입니다. ‘의의 흉배’는 사탄의 이러한 공격을 무력화시키는 가장 큰 무기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로 의롭다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군사들입니다. 복음의 신(15) 당시 로마 보병의 막강한 힘은 ‘군화’로 상징되었습니다. 가죽으로 만들어서 징을 박고 보호대와 끈이 있었던 그 군화를 로마의 군사력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군화 발자국이 찍히는 곳마다 피와 살육과 전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성도의 신발은 ‘평안의 복음의 신’입니다. 교회와 성도가 가는 곳에는 평화가 넘치며 복이 선포됩니다. 믿음의 방패(16) 사탄이 하와를 공격한 것은 그녀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하와는 하나님과 그 약속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서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굳건한 믿음, 하나님에 대한 신뢰 – 이것은 사탄의 사악한 공격을 막아내는 가장 큰 방패가 됩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가장 자주 범하는 실수, 혹은 죄는 하나님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을 사는데 수많은 다른 빙패들을 준비하게 되고, 세상에 근거한 모든 방패는 사탄의 공격 앞에 무력화되고 맙니다. 구원의 투구(17) 신학자인 Charles Hodge는 구원의 투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그리 스도인을 꾸며 주며 보호해 주고 그로 하여금 확신과 기쁨으로 머리를 들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세상 가운데서 머리를 들 수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은 우리의 ‘머리’를 보호해주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성령의 검, 말씀(17) 한 가지 공격의 수단이 소개됩니다. 그것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면서 사탄을 물리치실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합니다. 말씀은 마귀의 모든 궤계를 꿰뚫는 검이 됩니다. 기도(18-20) 성도가 준비해야 할 마지막 무기는 바로 기도입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18) 여기서 기도하라는 말씀에 강조하는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여러 가지 방법으로), 항상(무시로/언제나), 항상 힘쓰며(기도만이 아닌 희생과 헌신으로), 여러 성도를 위하여 간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19절에서 자신을 위한 기도의 부탁도 함께 합니다. 사역자는 늘 성도들의 기도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이 성도와 교회 앞에 진지하게 고백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울이 지금 ‘쇠사슬에 매인 사신’ 즉, 갇혀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3:1에서 ‘너희 이방을 위해 갇힌 자’라고 했고, 4:1에서는 ‘주 안에서 갇힌 자’라고 했습니다. 이제 6:20에서 바울은 ‘복음을 위해 갇힌 자’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죄와 악의 세력이, 혹은 정사와 권세가 바울은 가둔 것이 아니라 이방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고 복음을 위해 자신이 갇히는 것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따라서 능동적인 것이며 감사와 찬양의 이유입니다. 그는 육신의 자유의 대가를 지불하고 이 세 가지 일에 충성된 일꾼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마지막 고백은 아름답습니다. 19-20절에서 바울은 오직 말씀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이 갇혀 있거나 혹은 자유롭거나 예루살렘에 있거나 로마에 있거나 자신을 통해 증거될 하나님의 말씀만이 중요합니다. 그의 관심이 우리들의 관심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가 무장했던 전신갑주를 우리가 함께 입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초대 교회에 허락하셨던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우리 교회에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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