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 | na kim | 2017-01-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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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9. 12. 초대교회 수요예배 / 에베소서 강해
14.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엡 6:21-24) 제가 편지를 가장 간절하게 기다려 본 경험은 그리 길지 않았던 사관 후보생 시절이었습니다. 특히 특별 교육기간 3주를 마치고 다른 동료들이 편지를 받기 시작할 때... 아직 나에게 도착하지 않는 편지를 기다리던 그 간절함이란 잊혀지지 않습니다. 군대라는 제한된 공간 속에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였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잊혀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편지를 주고받을 때마다 서로 얼굴을 대면할 때는 하지 못했던, 가장 간절하고 진심이 담긴 표현을 하려고 노력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에베소 교회와 세계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을 향한 사랑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편지마다 간절한 마음과 사랑을 담았고 이제 오늘 본문에서 에베소 교회에 대한 편지를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보고 싶은 얼굴들... 기도하며 생각하며 편지를 썼을 것입니다. 시력이 좋지 않았던 스승은 편지를 구술하고, 스승의 구술을 따라 땅 바닥에, 혹은 거친 나무 판 위에서 제자는 편지를 받아쓰면서 “아니... 그게 아니라... 이렇게 써볼까...저런 표현을 할까?”고민하면서 썼을 것입니다. 이제 한 교회를 향한 편지의 마침표를 찍으며 사도 바울은 어떤 마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에베소서의 마지막 부분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그들에게 마지막까지 확인시키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 그리스도와의 연합하다. 에베소서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주제는 ‘성도와 교회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에베소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적 연합’은 원래 이방인들에게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7(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에서 말씀하는 것과 같이 오직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함’이라는 놀라운 은혜 가운데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에베소 교회의 모든 성도는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방인이었고 구원 받을 아무런 자격이 없고 헛된 삶에 길들여져 있었지만 이제는 성령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 날마다 ‘지어져 가야 하는 것(2:22)’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날마다 지어져 갈 수 있습니까? 성경은 옛 것을 버리고 새 것을 입으라고 권면합니다.(4:22-24) 옛 것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삶이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썩을 것이요 죽음의 형벌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도는 옛 것,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것,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새 사람은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더 이상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허락하신 은혜로 살아가는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하고(4:1)’,‘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하나님을 본받는 자’(5:1)가 되어야 하고’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5:8)’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의 삶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모습을 가정과 사회생활에서 제시했습니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성도의 삶의 가장 구체적인 모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의 섬김과 사랑을 설명하지 않고는 성도의 삶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악하고 간교하며 지혜롭습니다. 성도의 신앙과 삶을 충분히 파괴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많은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와 성도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권면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아니면 세상 가운데 성도가 보호 받을 수도, 자신을 지킬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상상해 봅시다. 구술을 마친 사도 바울이 자신의 편지를 한번 읽어보라고 말합니다. 제자가 천천히 편지를 읽습니다. 이제 바울은 마지막 인사말을 하고 싶습니다. 얼굴에 한편으로는 그리움과 사랑이 다른 한편으로는 안쓰럽고 걱정스런 마음이 주름져 있습니다. 인사말을 어떻게 쓸까....? 무슨 말로 위로와 격려를 보낼까...? 고민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를 오늘 본문과 같이 썼습니다. 두기고에 대하여 연로한 바울을 위해 함께 감옥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골 4:10-14) 아직 바울이 완전히 형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두기고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 대해서 성경은 몇 가지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먼저 행 20:4-5(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를 봅시다. 1) 그는 바울의 전도 여행에 동행하던 사람입니다. 바울의 전도여행은 결코 쉽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그는 전도 여행에서 감옥에 이르기까지 바울과 함께 하기를 원했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그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숨기지 않습니다. 골 4:7-8(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 내가 그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내는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을 봅시다. 두기고는 바울의 편지와도 같습니다. 두기고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는 바울의 메시지는 아무도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메신저로서의 바울과 그의 메신저로서의 두기고를 연결시켜 보십시오. 2) 결국 두기고는 예수님의 메신저로서의 삶에 헌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디도서 3:12(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 때에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내가 거기서 겨울을 지내기로 작정하였노라)에서 바울은 당시 목회자였던 디도에게 두기고를 보내겠다고 말합니다. 이 기록을 볼 때 바울은 한 번만 에베소 교회에 두기고를 보낸 것으로 그치지 않고 반복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두기고의 성실함을 엿볼 수 있고 그를 향한 바울의 신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기고는 이렇게 쓰임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가 이렇게 신뢰를 받으며 쓰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요?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바울의 표현 가운데 한두 가지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두기고를 소개하면서 잊지 않는 표현이 있습니다. 4) 두기고는 ‘사랑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골로새서에서는 현재형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에베소서에서는 이미 받은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랑을 받았고 그 사랑에 대해 감사하는 삶을 살았고 그리고 다시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앞서 에베소서에서 ‘사랑을 받은 자녀 같이 너희는 사랑하는 자녀가 되라’고 권면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은 만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사랑의 관계의 깊이만큼 서로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그가 받은 사랑과 은혜가 바울에게 변함없이 전달되고 있고 그것은 신뢰로 변화되었고 그리고 성실하게 교회와 성도를 섬기는 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두기고는 서신서에서 그 위치가 독특합니다. 그는 아주 특별한 일꾼이기도 하고 아주 평범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5) 그는 사도나 교사, 목회자가 아니면서 사도 바울의 사역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그에 대해 표현하면서 잊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진실성이었습니다. 그는 사랑 받은 사람이요, 진실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바울이 될 수는 없지만 모든 성도가 두기고는 될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을 확인하고 우리 안에 있는 진실함을 회복한다면 우리는 두기고와 같이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평안, 그리고 믿음을 겸한 사랑을! 유대인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이 서로에게 평안을 전했던 이유는 그것이 그만큼 간절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평안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 안에서의 평안을 기도했고 오늘 바울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평안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바울의 인사는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이 확인하는 사랑은 ‘믿음을 겸한 사랑’입니다. 왜 사랑에 믿음을 겸해야 할까요? 이것이 바로 교회가 다른 어느 단체와 다른 관계 속에 있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회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모이고 정을 나누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 정과 사랑이 믿음과 함께 하지 않을 때 언제나 악하고 불순한 결과를 되돌려 줍니다. 참된 사랑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믿음을 겸한 사랑은 바로 이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4. 은혜가 있을지어다. 마지막 절에서 바울이 에베서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은혜’입니다. 바울이 기도하는 은혜는 과연 무엇일까요? 24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기를 소원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그 은혜는 그리스도와의 변함없는 사랑의 결과로 주어지는 은혜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어떤 은혜가 있을까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변할 때는 언제입니까? 그것은 내적인 문제가 있을 때와 외적인 시험이 있을 때입니다. 내가 내 속에 있는 죄와 타협할 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사라집니다. 내가 시험과 유혹에 넘어질 때 그 사랑이 약해집니다. 그 결과 죄와 뒹굴게 되고 넘어지게 되고 죄의 달콤한 열매를 먹지만 그 책임을 함께 지는 비참한 결과는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때로 실수하고 넘어지지만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하나로 모든 실수와 연약을 극복합니다. 이 땅 살아가는 동안 실수가 없을 수 없고 범죄가 없을 수 없지만 그 모든 연약함을 이기는 힘은 변함없는 그리스도와의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기록하게 하시고 그 편지를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사랑이요 은혜입니다. 그 사랑과 그 은혜를 늘 생각하면서 날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삶, 날마다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삶, 날마다 사랑 받는 자녀의 삶, 날마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 날마다 빛 가운데 거하는 삶, 그리하여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성도와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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