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분론 - 5.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사역 | na kim | 2017-01-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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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30. * 본 문 : 빌립보서 2장 1-11절 말씀 * 제 목 : 직분 - 5.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사역 현대 기독교에서 가장 많이 희생당하는 단어들이 있다면 그 중 하나는 ‘하나님께 영광’일 것입니다. 우리는 참 많은 헌신과 수고에 이 말을 붙입니다. ‘희생’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다소 그 동기가 부정적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쉽게, 생각 없이 이 말을 붙여서 잘못된 동기를 합리화하기도 하고 좋지 못한 결과를 포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교회와 성도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받는 직분의 목적은 한편으로는 좋은 지체가 되어 다른 성도들을 섬기기 위한 것이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이 ‘사람을 섬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림’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에게 물어 봅시다. 내가 직분자로 교회를 섬긴다고 할 때 내 안에 있는 가장 중요한 동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목적에 충실합니까? 아니면 그 외에 많은 목적들이 함께 꿈틀거리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를 기록하던 당시의 교회의 상황은 본문 2-3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권면하시는 내용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왜 그런 권면이 필요했을까요? 이와 반대되는 현실이 그들의 교회적 상황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음도 다르고 사랑도 다르고 뜻도 다르고 한 마음도 아닌 그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다툼과 교만과 허영이 섬김과 헌신의 동기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빌립보서를 통해서 그런 현실에 놓인 교회에게 바른 가르침을 주고자 하십니다. 그들이 회복해야 할 내면의 동기와 목적은 바로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마치 각각 다른 장작들이 모여서 모닥불이 되는 것처럼 각각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 함께 일해야 합니다.
2장 1절은 아주 흥미있는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교회 안에서 그 어떤 사역이든 하려거든....’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무슨 일이든지 하고 싶은 성도는 먼저 점검해야 할 원칙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1장에 있습니다. 1장을 보면 빌립보 교회에는 사도 바울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옥에 갇혀서 더 이상 빌립보 교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을 오히려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빌 1:14-15)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는 30절에 나타납니다.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빌 1:30) 성령의 역사하심이 눈에 보이던 시절, 예수님의 사역과 죽음과 부활을 함께 경험했던 사도들이 생생한 복음을 전하던 시절이었는데, 그들에게 싸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2장 1절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싸움’의 현실과 ‘권면과 사랑과 위로와 교제와 긍휼과 자비’의 사역 -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이 두 대립되는 개념의 충돌을 경험하신 일이 있습니까?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2:2는 아주 짧은 구절입니다. 하지만 4번 같은 의미의 단어가 반복됩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차이를 인정하지만 그 차이가 하나님의 뜻과 사역을 결정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은 각각 다르지만 하나님은 한분이십니다. 각각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입니다. 각각의 다름이 만들 수 있는 그 어떤 부조화도 하나님의 교회를 향하신 뜻과 목적을 훼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선택해야 할 첫 번째 원칙입니다. 교회는 함께 일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아래와 같은 고백을 담대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고 섬깁니다.” 비로소 우리는 모든 차이를 넘어서는 성령 하나님의 하나 되게 하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 겸손해야 합니다. 두 번째 원칙은 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겸손’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했습니다. 2절에서 강조했던 같은 마음, 같은 뜻은 바로 겸손한 마음으로 요약됩니다. 3절 후반부에서는 겸손한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설명합니다. ‘다른 사람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 낮은 마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심을 받아서 서로 하나 되는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을 품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겸손하지 못한 것은 내가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거나 다른 사람이 잘못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따라서 첫째는 내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지 않을 가능성에 대한 인정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완전하십니다. 모든 것을 보는 것 같지만 가려져 있고, 모든 것을 아는 것 같아도 여전히 한계가 있습니다. 내가 알고 확신하는 것이 완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이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두 번째는 나뿐만 아니라 저 성도에게도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저 성도 또한 기도합니다. 그의 판단과 선택에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권위를 주지 않았습니다.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방식으로 성령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때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마가에 대한 선택은 그들이 각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고 모르는 것에 근거해서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다른 성도의 연약함과 부족함에 대해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하는 태도, 그 정도의 연약함과 부족함은 내게도 다른 상황에 나타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관대한 태도가 필요하겠습니다. 비로소 다른 성도를 존중할 수 있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나만이 아닌 그에게도 역사하신다는 믿음이 필요하겠습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관계와 교회를 맡길 수 있게 됩니다. 3. 먼저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 원리는 ‘자기희생’에 있습니다. 4절에서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라고 했습니다. 우선되는 의무는 자신의 일을 스스로 해결하려는 의지입니다.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원칙과 같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먼저 돌아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자신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동시에 다른 성도들을 돌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장작불을 피워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불은 옮겨 붙습니다. 자신을 태우지 않고서는 불을 옮길 수 없습니다. 먼저 자신을 태워서 다른 장작에 불길을 옮깁니다. 비로소 장작불이 되고 큰 불을 만들어서 목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아마도 먼저 태우는 장작은 가장 잘 마르고 잘 준비된 장작일 것입니다. 좀 마르거나 젖은 장작을 먼저 태우지는 않습니다. 잘 준비된 장작이 덜 준비된 장작을 마르게 하고 준비되게 해서 함께 불을 만들게 됩니다. 교회의 원리와 같습니다. 교회는 스스로를 태워서 성령의 불길을 만들고자 하는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자신을 먼저 태워서 재로 만들 수 있는 용기와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헌신이 없는 예배가 없는 것처럼 희생이 없는 사역은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4. 예수님처럼 합시다. 이 세 가지 원칙은 참 아름답습니다. 함께 헌신하고, 겸손하게 헌신하고, 자신을 희생해서 헌신할 수 있다면 정말 아름다운 교회와 성도가 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잘 압니다. 우리는 그리 인내심이 많지도 않고 그리 선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이기적인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이 원칙을 지킬 수 있을까요? 성경은 그 예를 제시합니다. 5-8절에서 성경은 우리가 본 받고 품어야 할 한 마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왜 우리가 이 마음을 품어야 할까요? 먼저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 그 차이의 거리는 참으로 엄청납니다. 그런데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와 성도의 차이는 얼만큼일까요? 예수님과 우리의 차이만큼 큰 것일까요?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와 같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같이’ ‘함께’ ‘하나’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본을 보이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겸손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으로서의 자신을 비우고 종의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주님이 자신을 낮추어서 종이 되셨을 때 비로소 우리 안에 참된 평화가 실현되었습니다. 우리의 평화 또한 낮은 곳에서 실현됩니다. 세 번째 예수님은 자신을 먼저 희생하셨습니다. 스스로 십자가에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시되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자신을 희생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는 희생하지만 사람들을 위해서는 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자신의 희생의 범위와 한계를 제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만일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희생에 대해 범위와 방법과 한계를 제한하셨다면 우리의 구원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사역이 11절에서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섬김에서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말이 가장 가치있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세 가지 원칙이 예수님의 예를 통해서 잘 지켜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로소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교회와 사역의 목적이 성취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예배하고 섬기고 헌신합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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