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분론 - 6. 이기는 싸움 | na kim | 2017-01-20 | |||
|
|||||
2016. 12. 06. * 본 문 : 전도서 3장 11절 말씀 * 제 목 : 직분론 - 6. “끝을 생각하며 새롭게 시작하라.” 가일이가 입학할 학교가 결정되고 난 다음 대화하는 시간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가일이가 일부러 저의 주위를 어슬렁거리기도 하고, 저 또한 대화하기 위해서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가일이에게 꼭 가르쳐야 할 덕목들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최근에 이야기하기 시작한 주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싸움의 기술’에 관한 것입니다. 좀 이상하게 들리십니까? 이제 대학에 들어가면 부모의 품에서 거의 벗어납니다. 부모는 세상에 자녀를 내놓기 전에 생존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원시 시대라면 사냥하는 법을, 농경시대하면 농사법을, 그리고 오늘날 악하고 유혹 많은 이 사회 속에서는 그저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삶의 존엄을 지키며 가치와 목적을 추구하며 사는 법을 가르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세상과 제대로 싸울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가일이에게 두 가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는 패배하지 않는 법과 둘째는 승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패배하지 않는 법은 기다림과 관련이 있고, 기다림은 ‘때’와 관련이 있습니다. 자신이 품은 뜻과 허락된 능력에 대한 통찰과 관련이 있습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분노는 비록 그것이 정의롭다고 할지라도 허망하고 참담한 결과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거룩하고 정의로운 뜻으로 단련하면서 스스로를 성장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때를 기다리면서 자신을 준비해야 합니다. 저의 젊은 날을 함께 했던 친구들을 기억합니다. 어떤 친구들은 대학에 다니는 중에 이미 삶에 허락된 모든 분노와 열정을 다 쏟아버렸습니다. 뜻은 정의로웠지만 삶은 지혜롭지 않았습니다. 20대에 생명을 버린 친구들도 있고, 그때에 모든 정의감과 가치를 소진한 친구들도 있습니다. 힘없이 세상을 따라 살아갑니다.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패배한 안타까운 청춘들입니다. 저와 친구들이 20대일 때에 만일 누군가가 패배하지 않는 법을 가르쳐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반면 그때 품은 뜻으로 여전히 성실하게 살고 있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쉽게 패배하지 않아야합니다. 또 하나는 ‘승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제가 가르치고자 하는 싸움의 승리는 상대방이 처절하게 궤멸되는데 있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파멸이 나의 승리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함께 패배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다면 대립하지 않고 상대방을 나의 편으로 만들면 좋습니다. 나와 같은 생각과 뜻으로 변화시킬 수 있으면 더 좋습니다. 어느새 내 편에 많은 사람이 서 있고 더 성장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내가 가진 신앙적 가치에 반하거나, 선과 악으로 나뉘거나, 공공의 이익과 사적인 이익이 충돌하거나, 공동이 합의한 목적과 가치에 위반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때 가일이가 너무 쉽게 싸움을 시작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싸움의 방법을 다양하게 선택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이기고 상대방이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선하고 거룩한 뜻이 이기고 우리가 함께 따라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기는 싸움은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그 품은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개인의 영광이 아닌 공동의 유익으로 결정되어야 합니다. 때로는 설득으로, 때로는 침묵으로, 때로는 서로가 어깨를 걸고, 때로는 기도하면서, 때로는 정의로운 싸움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일이와 이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알아듣는지, 얼마나 받아들이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이번에 임직하는 직분자들에게도 비슷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말씀을 요약하자면, “마음에 ‘끝’을 품고 늘 새롭게 ‘시작’합시다.”입니다. 1. “...그날을 생각해 본다.” “위대한 사람들의 무덤을 바라볼 때 내 마음 속에 있는 시기심과 같은 모든 감정을 사라져 버린다. 미인들의 묘비명을 읽을 때 무절제한 욕망은 사라져 버린다. 아이들 묘비에 새겨진 부모들의 슬픔을 읽을 때 나의 마음은 동정으로 누그러진다 또 그 부모들의 무덤을 볼 때 곧 따라가 만나야 될 사람을 슬퍼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쫓겨난 왕들이 그들을 쫒아낸 사람들과 나란히 묻혀 있는 것을 볼 때, 서로 경쟁하고 다투었던 사람들이 나란히 묻혀 있는 것을 볼 때,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놀라게 했던 성인들의 무덤을 볼 때, 나는 인간들의 하잘 것 없는 경쟁, 불화, 논쟁에 대해서 슬픔과 놀라운 생각에 젖는다. 묘비에 적혀 있는 날짜들을 읽어 보면 어제 죽은 사람도 있고 600년 전에 죽은 사람도 있다. 이를 보며 나는 우리 모두가 부활하여 천국에서 함께 사는 그날을 생각해 본다.”
- 조셉 에디슨(1672~1719/영국의 수필가,극작가,시인/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p.137) 혹시 몇 전 전에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책으로 공부했던 기억이 있으십니까? 그 내용 중에 ‘끝을 생각하며 시작하라’는 단락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늘 마지막 모습을 생각하면서 오늘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정신없이 살고 마음을 유혹하는 여러 가지 욕심으로 살기 마련입니다. 많은 염려와 걱정이 우리 삶의 방향을 혼란스럽게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끝을 생각해야 합니다. 전도서의 지혜자는 ‘끝’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참된 지혜를 얻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지혜와 부와 명예와 쾌락을 다 누렸다고 생각했는데, 그 모든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지혜는 바로 ‘끝’에 있었습니다. 직분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또 하나의 동기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미리 비유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처럼 ‘회계할 시간’을 생각하며 오늘을 섬겨야 합니다. 그날의 승리를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이 땅에서의 삶의 영광과 관계없이 우리는 처절한 패배를 경험할 수 있고, 뜻밖의 승리의 영광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 앞에 서는 일, 우리가 생각해야 할 ‘끝’입니다. 2. 우리는 계속 실패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는 계속적인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사역은 실패의 연속입니다. 사람이 그렇습니다. 예수님 또한 공생애 3년에 사람에 대한 사역의 성공을 경험하지 못하셨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수많은 배반을 경험합니다. 자신이 세웠던 교회의 성도들이 자신을 배척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세상은 복음으로 살고자 하는 직분자들에게 적대적입니다. 직분자의 삶이 복음화될수록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더 간교해 질 것입니다. 시간 또한 직분자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늘 바쁘게 돌아가고 어느새 세월은 이만큼 지나가 있을 것입니다. 큰 교회가 우리의 성공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지난 신앙생활을 돌이켜 보십시오. 우리는 함께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 교회로 허락하신 성도들에 의해 참 많은 실망과 실패를 경험해왔습니다. 가장 믿었던 성도, 가장 의지했던 직분자, 존경했던 사역자들에게 신앙적인 배반감을 느껴왔습니다. 계속 실패합니다. 한 때 열심을 품지 않은 성도는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한번은 청춘이었듯이 누구나 한번은 영적인 열정으로 활활 불타올랐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실패를 경험하면서 심령이 상합니다. 쉽게 피로를 느낍니다. 상처가 축적되어 있습니다. 작은 상처에 크게 반응합니다. 기억된 반복적인 실패가 내 안에서 늘 숨 쉬고 있습니다. 너무 지친 채 신앙생활을 합니다. 3. 날마다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 90의 시인은 아침을 노래합니다. 하나님께서 새날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시 90:14) 시 59:16에도,, 시 92:1-3에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새날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매일 새로운 은혜를 공급받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의 이스라엘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좋은 그림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은 아침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를 통해서 경험했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통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일을 염려하여 받은 은혜를 개인화하고 축적하려 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경험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직분자들은 끝을 마음에 품고 오늘을 새롭게 시작하는 영적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어제 받은 상처와 아픔과 패배를 굴러보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넜을 때 중요한 의식을 하나 행하게 하십니다. 바로 할례였습니다. 그들 중에서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아직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할례를 명령하셨습니다. 성경은 그 의미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또 그 모든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머물며 낫기를 기다릴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수 5:8-9) ‘길갈’이라는 지명의 뜻은 ‘굴러버리다’입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패배의 땅이었습니다. 그들은 400년을 죄와 악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애굽에서 벗어난 그들은 광야에서 그들 자신 안에 있는 애굽에 갇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스스로 패배하게 했던 모든 수치와 절망을 잘라서 굴러버릴 것은 명령하셨습니다. 비로소 그들이 새롭게 되어 허락하신 새 땅 가나안에 입성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허락하신 직분으로 섬기기를 원하는 직분자들은 날마다 새로운 은혜와 힘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아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를 두렵게 하고 패배하게 했던 연약함과 두려움, 패배와 절망의 시간을 굴러버려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매일 패배하게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날마다 하나님의 승리로 새롭게 하십니다. 4. 승리하신 예수님을 따라갑시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목회의 실패를 말합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목회와 상관없이 새롭게 신학을 정리해서 교회를 일으켰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날의 교회가 예수님의 복음적 전통에서 벗어나서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그리스 철학에 영향을 받아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런 주장은 예수님의 사역을 실패를 말하는 각종 이단에서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실패하셨을까요? 어쩌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시기 전부터 실패를 경험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메시야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자신들의 원하는 방식의 메시야를 기대했습니다. 잉태의 순간부터 거절을 경험해야 했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패배했습니다. 성장의 과정은 도피의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생명의 복음을 선포해도 세상은 예수님을 지속적으로 거절했습니다. 거절의 절정은 십자가였습니다. 제자들은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실패했습니까? 만일 예수님의 승리가 이 땅에서의 모든 영광에 있었다면 그들의 말이 옳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예수님의 승리를 노래하고, 세상의 패배를 선언했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예수님의 승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그 삶에서 이루어지는데 있었습니다. 사탄은 세상의 법으로 예수님을 유혹하려 했지만 예수님은 단 한 번도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그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증거되는 것을 목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결국 시험과 유혹을 이기셨고, 승리하셨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죽임당한 어린 양’ - 우리의 승리의 상징입니다. 우리 교회는 곧 새로운 직분자를 세웁니다. 교회와 성도들과 함께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는 아름다운 직분자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지치거나 낙심하여 패배자로 남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은 승리하셨는데 우리는 패배하여 더 무거운 십자가가 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그 영광, 그 끝을 바라보며 날마다 용기 있게 싸움터에 나서는 직분자들과 교회와 성도들을 기대합니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