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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 5.답은 십자가에 있습니다. na kim 2017-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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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예배 - 골로새서 2017. 2. 1.

5. 답은 십자가에 있습니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가장 많이 문제를 제기하는 말씀이 있다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4:6)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기독교의 폐쇄성을 설명하는 말씀으로 언급되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믿는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가 아니면 안되는 이유는 명백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모습이 아닌 완전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사람의 삶을 산다면 바로 이런 모습으로 산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람을 지으신 창조주의 뜻이 완벽하게 구현된 삶의 구체적인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그 삶의 절정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유혹 받고 있는 몇 가지 주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그 몇 가지 주제로부터 억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골로새 교회를 억압하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자유할 수 있을까요?

 

학문과 철학에 속지 말라.(2:8-15)

 

세상의 모든 학문은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새롭게 발견하고 밝혀내는 과정입니다. 그 대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와 사람입니다. 결국 모든 학문의 대상은 사람이요 피조물입니다. 그렇다면 그 학문의 끝은 무엇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신의 영역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 학문이 신을 부정하는 학문이건 혹은 신을 연구하는 신학이건 세상의 모든 학문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발걸음(과정/過程)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학문의 과정이 주는 논리성과 과학성에 마음을 빼앗김으로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지 못하게 되는 위험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는 당시 초대교회를 위협하던 영지주의의 유혹은 초등학문이라고 비판합니다. 모든 초등학문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한두 발걸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한 두 발걸음으로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뜻으로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바울은 초등학문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오직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그리스도를 바르게 알 것을 권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이 땅에서 가장 귀한 것으로 여김 받고 있던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리셨습니다.(2:14-15) 그것이 가진 헛되고 헛됨을 십자가 위에서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그 모든 세상의 거짓된 진리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학문은 이 땅으로부터 하늘을 향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올라가면 하나님께 이를 수 있을까요? 결국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 넓고 깊고 높고 큰 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채우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승리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충만하게 알게 되고 그 사랑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신 그리스도가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종교를 버리라.(2:16-19)

 

교회와 성도들에게 익숙한 말들이 있습니다. 사랑, 은혜, 용서, 자비..등등의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들로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설명하고 결단하는데 익숙합니다. 예수는 믿으니까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과 희생의 삶을 나도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고...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예배하기만 하면 나는 저절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전해지기 전에도 우리에게는 종교가 있었습니다.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면 복이 있다는 것 정도는 모두가 받아들입니다. 무엇인가 악하고 이기적인 삶을 살면, 남을 괴롭히면, 악하게 살면 반드시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가능하면 오래 복을 누리면서 살고 싶습니다. 기복신앙과 인과응보사상은 한국인뿐만 아니라 모든 종족이 가진 보편적인 신념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보편적인 종교성을 대신하고 있던 것이 전통과 율법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지키면 신앙적 의무를 다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대로 그것에서 부족하면 신앙을 부정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할례입니다.

 

우리는 자주 십자가의 신앙을 보편적인 종교의 수준에서 이해합니다. 참된 신이 아닌 인간의 종교성이 만들어낸 신앙은 우리를 간섭하지 않습니다. 기드온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분노를 일으킬 때 가장 먼저 바울신상을 깨뜨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신상을 그것으로부터 깨뜨려도 아무런 벌이 없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을 간섭하지도 지배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만들어내는 이런 종교성은 예수를 믿는 우리들 안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신앙을 종교성의 수준으로 떨어뜨리기 때문입니다. 언제 그렇습니까? 우리의 신앙에 회개가 없을 때 그렇습니다. 내 삶의 변화가 없을 때 그렇습니다. 우리는 종종 반복되는 문제로 괴로워하면서도 복음이 그 문제에 대해 내 삶에 역동하도록 허락하지는 않습니다. 내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복음, 나를 위로하고 이해하지만 나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복음을 믿는 우리는 예수 신앙을 적당한 종교성으로 격하시키는 일에 협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좋은 말로 나를 포장하고 신앙적인 말과 행위로 스스로를 위로하는데 그치는 신앙은 능력도, 열매도 없습니다.

 

인간의 노력에 소망을 두지 말라.(2:20-23)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는 성도들이 빠지기 쉬운 유혹 중 하나는 육신을 괴롭게 함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을 보이려는 것입니다. 요즘도 고난 주간이 되면 매년 십자가의 고통을 체험하는 사람들이 있고, 고행과 고통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으려는 노력을 하는 성도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보다 나을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도 이런 전통들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교 전통에서 금식과 기도를 통한 경건을 훈련하는 전통이 있었고 복음이 전해지는 많은 곳에서 일정한 수련과 고행의 과정을 통해서 신과 교감하는 전통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곳에 복음이 전해졌지만 여전히 전통 또한 남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경건 훈련의 전통을 고집했고 각각 다른 방법 간에 마찰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서신서 곳곳에서 이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딤전 4:8에서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니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에 있느니라고 말합니다. 고전 8:8에서는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이런 행위를 의문(儀文)에 순종하는 것사람들의 명과 가르침을 좇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바울은 결론 내리기를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로울 뿐이라고 말합니다. 인위적인 헌신이나 노력으로 하나님을 이룰 수도, 만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저는 축구를 좋아합니다. 가장 원시적이고 남성적인 운동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정한 시간에 최선을 다해서 뛰고 나면 온 몸의 에너지가 다 빠져나간 느낌입니다. 피곤한 몸을 통해 느끼는 쾌감이 있습니다. 아마도 운동에 중독된 사람들은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몸에 있는 모든 에너지와 땀이 다 빠져 나가는 느낌, 그래서 자기 자신과 싸우는 느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이와 같이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섬기고 사랑하는 예수는 사라지고 내가 섬기고 헌신하는 느낌 자체를 더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유능한 사람이라는 것, 내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 그래서 내가 사용되고 있다는 느낌 자체가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헌신, 그리스도를 상실한 헌신은 아무리 땀과 피를 많이 흘려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없습니다. 상처와 아픔만이 남을 뿐입니다. 우리의 헌신에 십자가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 신앙의 중심

 

워런 W. 위어스비 박사는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살아 있는 연합의 관계로서, 그리스도는 머리이시며 우리는 몸의 지체들이다. 당신은 율법이 몸에 작용하게 해서는 안된다. 몸은 양분을 공급함으로써 활동을 하게 되는 것이지 법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누가 자기의 위에다 대고 소화를 시작하라! 아픔을 멈추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러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생활을 개인적으로 또는 교회적으로 육신의 규율로 말미암아 신령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기준(세상을 사랑하지 말라)을 믿지만 기준에 대한 외적인 순종이 반드시 내적인 영성을 산출한다고 믿지는 않는다. 우리는 세상적인 요소들에 대해 죽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살아 있다. 그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다.”

 

사람이 만든 규율에 순종하는 일은 외적으로 보기에는 매우 경건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 규율에 더욱 깊이 나아가는 것으로 깊은 경건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약간의 유익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학문도, 율법도, 고행과 헌신 또한 그렇습니다. 바울은 그 모든 것에 그리스도의 그림자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없을 때는 그림자를 붙드는 것 외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유대인들은 구약의 율법과 전통에 빠져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림자의 실체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림자를 안고 있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며, 어리석음에 지나쳐서 죄가 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을 부정하고 자신의 헌신과 노력에 의지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의 주제는 우리의 모든 필요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3에서 바울은 영으로 시작하고 육체로 끝맺는 일의 어리석음에 대해 경고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시작하고 나의 노력으로 나의 종교성을 만족시키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부르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되고 그 안에서 지속적으로 예수를 만나고 교제하는 삶, 이것이 우리 주님이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성도의 삶입니다. 세상의 학문이 아니라, 종교성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신앙의 여정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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