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6. 새사람으로 살다. | 이응도 | 2017-06-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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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예배 - 골로새서 2017. 2. 8. 6. 새 사람으로 살다.(골 3:1-11) ‘광해, 왕이 된 남자’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2012년에 개봉하여 1,230만이나 되는 관객을 모았습니다. 영화의 내용과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나서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연산군과 더불어 조선 왕조의 대표적인 폭군으로 알려진 광해군은 오늘날 고등학교 역사 교사들에 의해 재평가되어야 할 역사인물 1위로 손꼽힐 만큼 잘 알려지지 않은 의외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였던 선조가 임진왜란이 발생하자마자 피난을 떠났을 때, 한양에 남은 분조(分朝)를 이끌고 백성들을 돌보며 의병을 일으켜서 왜병들에 맞섰습니다. 왕이 되고 난 후에는 ‘대동법’(大同法) 시행을 놓고 양반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영화에서도 백성들을 위해 대동법을 실행하려는 왕권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법의 실행을 막으려는 양반들의 권력 다툼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광해군 일기에는 대동법에 대한 광해군의 마음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만나 풀과 나무 등 온갖 생물이 즐거워하는데 유독 우리 백성들만 위태로워 죽기 직전이다. 그런데도 그들을 보살피지 않는다면 백성의 부모된 도리가 아니다. ……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 가운데 없앨 수 있는 것은 없애고, 굶주린 자들은 착실히 도와 줘서 목숨을 잃는 자가 없도록 하라.”(광해군 일기)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선의 전국토는 황폐화되었습니다. 전국적으로 경작 가능한 토지의 면적이 임진왜란이 있기 전 전라도가 보유했던 경작 가능 토지의 면적과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조세정책이 각 행정단위별로 세금이 부과되면 백성들이 지역에 부과되는 세금에 대한 책임을 분담해야 했습니다. 백성들은 전쟁으로 인해 땅을 잃고 대부분 양반들의 땅을 빌려서 소작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소득의 절반 이상을 이미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라에서 지방 행정 단위에 부과한 세금에 대한 책임까지 져야 하는 불합리한 구조 속에 있었습니다. 광해군은 ‘대동법’을 통해서 토지를 가진 만큼 쌀로 세금을 내는 법을 재정했습니다. 당연히 양반들의 반발은 거셌습니다. 이 법이 전국적으로 시행되는데 10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정치적으로 희생당했다고 보는 것이 역사학적인 견해입니다. 영화는 양반들의 독살 위협에 시달리던 광해군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몸져눕게 되는 일로 시작합니다. 왕권의 공백을 우려한 도승지 허균은 저자거리에서 왕과 꼭 닮은 ‘하선’이라는 천민을 발견합니다. 그는 하선에게 ‘왕의 병이 나을 때까지’ 왕의 역할을 대신할 것을 주문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광해군에 대한 기록에 빠져있던 15일에 대한 의문을 영화는 이렇게 해결합니다. 하선의 ‘광해군 노릇’에 영화의 재미가 있습니다. 하선은 왕의 역할을 하면서 대동법을 비롯한 개혁정책들을 과감하게 실행합니다. 당시에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려던 광해군과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던 양반들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상황에서 평소의 왕 답지 않는 결정에 조정의 대신들을 놀랍니다. 그 과정에서 하선은 왕으로 살아가는 일에 매력을 느껴서 잠시 마음이 흔들리기도 하지만 결국 그는 자신이 왕이 아니고, 왕으로서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광해군은 회복되고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하선의 모습이 상징적으로 묘사되면서 영화는 끝납니다. 1. 두 가지 역할 이 영화는 꽤 영리합니다. 하선이라는 주인공은 두 가지 정체성의 혼란함을 경험하고 또 두 가지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는 천민에서 왕이 되는 경험을 합니다. 그는 광해군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왕의 습관과 생각을 천민이 따라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또한 그는 이전의 광해군과는 다른 개혁 성군(聖君)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는 원래의 광해군이 양반세력에 밀려서 실행하지 못했던 개혁정책들을 과감하게 실천에 옮깁니다. 이것 역시 쉽지 않습니다. 백성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하면 임금의 사명감을 가져야 하고, 국가 권력의 목적을 이해해야 하고 그 속성 또한 이해해야 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왕의 역할을 잘 해내기 어렵고 좋은 왕의 역할은 더 어렵습니다. 영화는 ‘하선’의 시선과 마음을 빌려서 ‘왕’으로써 그리고 ‘좋은 왕’으로써 각각의 정체성과 역할에 대해서, 그 사이에 놓인 긴장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저는 이러한 두 역할에 대한 긴장이 우리들 현대 교회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사람, 복음을 받은 사람, 성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과의 구별을 즐겨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처럼 살고 믿고 행동합니다. 점점 이 역할에 익숙해지는 것 같습니다. 가끔 서로 불편한 관계 속에 있기도 하고, 가끔 불만족스럽기도 하지만 우리는 적당한 타협을 할 줄 아는 것 같습니다. 이정도면 예수를 믿는 것이고, 이정도면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라고 불릴 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막 예수를 믿기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교회의 생활을 가르쳐줍니다. 교회라고 하는, 세상과는 구별된 관계에서는 이러저러하게 행동하면 됩니다... 라고 때로는 말로, 행동으로 가르칩니다. 그렇게 성도가 되어가고 교회가 되어 갑니다. 문제는 그렇다면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성도가 나처럼 예수를 믿으면, 나 정도만 믿으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치 광해군 역할을 해야 하는 하선에게 광해군처럼 해야 하고, 광해군과는 달라야 하는 두 가지 사명이 함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2.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향한 당부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강력하게 권면합니다. 먼저 묻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는가?”(골3:1上) 그렇다면, “위의 것을 찾으라”(골 3:1下) 하나님의 나라 밖에 있던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묻습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는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새생명을 얻었는가? 그렇다고 대답하는 성도들에게 바울은 강력하게 권면합니다. “이 땅에 있는 가치를 추구하는 삶이 아닌 하늘의 가치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가자!” 2절에서 다시 한번 반복해서 강조하기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땅에 속했던 옛사람은 이미 죽었고,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속했으며 새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맛볼 것이기 때문입니다.(3-4절) 마치 하선이 ‘광해군 노릇’하는 일에 만족하지 않고 짧은 기간이었지만 좋은 왕이 되려고 발버둥쳤던 것처럼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 새생명을 얻었다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답고, 새생명을 소유한 백성다운 삶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권면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했습니다. 생명을 얻은 일에 만족하는 성도가 아니라 그 생명이 더 풍성하게 역사하는 삶으로 변화되고 성장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의 목적입니다. 3.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다. 당시 골로새 교회를 가장 괴롭히던 이단은 영지주의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영적 지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화려한 말로 표현하면서 가장 현학적이고 교만한 방식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괴롭혔고, 반대로 자신들의 비도덕적이고 이기적인 삶을 합리화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로마의 귀족으로 살기를 원했고, 기득권을 놓치기 싫었으며, 누리고 즐기던 쾌락과 방탕한 삶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새생명에 대한 신앙적 호기심과 그들이 누리던 삶에 대한 집착을 함께 소유하려 했습니다. 5절에서 바울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고대로마의 귀족이 누리는 삶에 대한 ‘탐심’을 버리지 못하면서 새생명의 삶을 원했습니다.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바울의 권면은 강력합니다. 첫째 땅에 있는 지체를 죽여야 합니다. 가장 화려해보이고 가장 큰 유익을 주는 로마의 귀족이라는 신분 또한 땅에 속한 지체입니다. 복음이 그들에게 들어왔다면 그것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바리새인이면서 로마의 시민이면서 헬라 철학자라는 신분은 배설물에 불과했습니다. 둘째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는 사람은 먼저 자신을 속이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복음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 즉 기득권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를 격려합니다. 서로에게 있는 거짓을 인정하면서 서로가 복음 앞에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아도 된다고 자위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옛사람을 입고 있고 그 행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신에게, 서로에게 거짓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가장 자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던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그들의 자랑인 소위 ‘영적인 지식’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작은 티끌보다 작습니다. 4. 차별 없는 복음 11절은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복음 앞에서는 차별이 없습니다. 복음을 받는가? 받지 않는가? 복음을 받았다면 복음으로 사는가? 살지 못하는가?의 기준만 있을 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있습니다. 교회가 역사적인 약자였을 때 성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사모했습니다. 고난과 핍박을 이기는 일에 믿음만큼 강력한 것은 없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되었다는 것은 세상이 주는 모든 차별과 고통을 이기는 강력한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세상의 강자가 됩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성공합니다. 가진 것이 많고 지킬 것이 많은 삶을 삽니다. 복음이 요구하는 삶을 살고자하면 잃은 것, 내려놓을 것이 점점 많아집니다. 교회는 두 가지 일을 합니다. 하나는 거짓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차별을 합리화합니다. 오랫동안 한국 교회를 병들게 했던 신앙은 기복신앙과 성공신화였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모든 것에서 잘 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의 원인과 목적을 변절시키는 사탄의 복음입니다. 한국교회의 비약적 성장은 이 거짓말을 서로 나누는 과정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사회의 차별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1970-80년대 수많은 기독 청년들이 거리로 나가서 사회정의와 평등을 외칠 때 교회의 정치 중립성을 강조하면서 침묵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떻습니까?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정권을 보호하기 위해 십자가와 태극기를 함께 들고 거리로 나서고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공공연하게 태극기를 들고 집회를 나갈 것은 강권합니다. 이미 교회가 부자가 되었고, 부자의 편에 서 있고, 그것이 옳다고 스스로에게 거짓을 말하며,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차별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엄중하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있습니까?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다시 한번 자신에게 물읍시다.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과 삶과 가치와 지식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끄러움 없이 살고 있습니까? 새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이 우리에게서 나타나고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원리로 삼아 우리의 일상을 살고 있습니까? // 우리가 입술과 마음과 삶으로 드리는 솔직한 대답이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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