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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 8. 관계에 허락하신 은혜 이응도 2017-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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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예배 - 골로새서 2017. 3. 1.

 

8. 관계에 허락하신 은혜(3:18-4:1)


 

비슷한 교회적 상황과 시대에 전달된 두 편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는 많은 내용에서 공통의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정과 사회적 관계에 대한 사도 바울의 부탁은 에베소서 5-6장에서 충분히 설명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관계에 대한 좀 깊은 신학적인 주제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오늘날 신학에 대한 다양한 접근이 시도되면서 삼위일체론생태학 (生態學/생물과 환경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생물학의 한 분야. 환경은 생물의 주변을 구성하는 생물적, 비생물적 요소를 모두 포함함)이 만나게 됩니다. 그 결과 관계신학’(relationship theology)이라는 신학적 개념이 발전하게 됩니다. 아직 현대 신학의 한 학문적 분야로 완전하게 인정받고 있지는 않지만 모든 신학적인 진리를 관계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관계신학이라는 대한 책을 출판한 김영선 교수(협성대학교 신학과)는 자신의 연구를 자극한 세 가지 모티브를 소개합니다. 가장 먼저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성에 주목했습니다. 하나님은 관계 속에 존재하시며 우리와의 관계를 통해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교회에 대한 부탁에 근거합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17:21-22)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에 근거하여 교회의 공동체성을 설명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교회의 사명에 관한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 가운데 보여주고 증거하는 거울과 같습니다. 교회가 생산하고 보여주는 죄와 악에서 해방된 거룩한 관계는 단절되고 고립된 삶을 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1. 관계 신학을 향한 좀 더 깊은 한 걸음

 

관계신학’(relationship theology)라는 말을 신학적 분야에서 처음으로 토론을 시작한 사람은 마틴 부버’(Martin Burber)입니다. 그는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관계야말로 실존의 범주요, 남을 맞아들이려는 준비태세이며, 영혼의 틀이다.”라고 말했고, 관계신학을 인간과 관계를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로 이해했습니다. 그는 모든 관계성은 두 가지 형태를 취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관계와 -그것의 관계입니다. -그것의 관계는 상대방을 대상화하며 수단화합니다. 그러나 -의 관계는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돌보며 헌신하는 관계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피조물인 사람을 -그것의 관계에 두지 않으시고 -의 관계에 두셨습니다. 사람의 연약함과 부족함에 가슴 아파하시고 동참하십니다. 사람을 위해 헌신하시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부버는 교회 공동체에 허락된 영적 의무가 바로 -관계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 관계에 들어온 사람들은 에 대해서는 헌신과 희생을, ‘에 대해서는 자율성과 독립성을 부여합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신앙이란 하나님과 사람과의 인격적 관계에 대한 고백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영적인 태도에 대한 서술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허락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경험한 화해와 용서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 대해 실현되고 경험되어야 하고, 그 경험은 공동체로부터 이웃에게로, 세상으로 증거되어야 합니다. 관계 신학의 힘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간 신학자가 있다면 영성신학자인 어반 홈즈(U. T. Holmes)입니다. 영성신학에 의하면 영성은 관계의 경험에서 시작합니다. 넬슨 떼이어(Nelson S.T. Theyer)영성이란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환경의 영향 아래 체험된 경험이라고 말합니다. 다양한 관계 속에서 살아온 삶의 경험이 영성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어반 홈즈는 기독교의 영성을 대상과의 관계경험을 통하여 인식의 확장과 고양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마음인 긍휼로써 세계 공동체 속에서 창조성을 드러내는 것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기도의 목적은 소원의 성취에 있지 않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깊은 관계의 형성에 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는 권면은 소원이 이루어질 때까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좀 더 깊은 관계로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인이면서 좀 더 깊은 관계를 목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셨고, 우리에게 기도할 수 있도록 문을 여셨으며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좀 더 깊은 관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관점에서 기도를 볼 때, 교회를 볼 때, 우리의 신앙생활을 볼 때 소원 중심의 기도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이루어지는 기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2. 하늘의 상전, 이 땅의 관계

 

골로새서 3장에서 제시하는 관계는 크게 가족적 관계와 사회적 관계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2000년 전 로마시대가 가진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가정 제도와 계급 제도 때문입니다. 그것이 한 사회를 지탱하는 강력한 원칙으로 인정되고 모든 사람이 그 제도 속에서 살아갈 때 큰 무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이며 모두가 평등합니다. 사람이 정한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교회적 관계 속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현 사회 제도가 가진 불합리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되고 교회적 관계에서도 갈등을 경험합니다. 교회는 이러한 갈등에 대해 대안을 제시할 의무가 있습니다.

 

골로새서에서 권면하는 모든 관계에 대한 원칙은 하늘의 상전에 대한 것입니다. 실은 이 원칙은 이미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신약의 모든 교회에 대해 천명하셨고, 하나님은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천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선포된 모든 계명의 기본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서로를 사랑하며 발을 씻기는 것이 신약 교회에 선포된 새계명의 기본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살면서 로마가 다스리는 제국의 통치 아래 있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영감을 따라 말씀을 전합니다. 모든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먼저 적용하라는 것입니다.

 

3. ‘-그것이 아닌 -의 관계

 

사도 바울이 전하는 이 관계는 마틴 부버가 말했던 -관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먼저 -그것의 관계가 가진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섬겨야 할 이웃이며 성도이며 지역사회이며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마틴 부버는 그것에는 인격성이 없고 정서의 동화가 없으며 단절된 관계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미국의 사회복지 제도에서 우리는 -의 관계와 -그것의 관계의 경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미국은 기독교 정신에 기반하여 세워진 나라입니다. 기독교 정신이 가장 잘 나타난 분야가 있다면 사회 복지에 대한 제도정 강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동경이 복지정책 곳곳에 스며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제도화되고 직업화되었을 때 생기는 문제들을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쉽게 다른 사람의 고통이나 필요를 대상화합니다. 판단해버리고 평가해 버립니다. 교회 또한 그렇습니다. 사회에서 발생한 가슴 아픈 문제들을 효율성의 관점에서, 혹은 정치적인 관점에서 판단하고 결정할 때가 있습니다. 공감하지 않기 때문에 그 대상은 이웃이 될 수 없고, 나의 사랑과 헌신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오늘날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미국 교회가 인디언의 역사를 외면하는 한, 한국 교회가 정치적 편향성을 극복하지 않는 한 교회는 사회의 아픔을 -그것의 관점으로 보고 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그렇습니다. 상담을 하는 저도 가끔 이 트랩에 빠집니다. 너무 잘 아는 문제이고, 일반적인 경향이며, 전형적인 패턴이라는 판단을 할 때가 있습니다. 피상담자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흘려듣기 쉽습니다. 공감되지 않습니다. 이미 듣기 전에 판단하게 되고 공감하기 전에 해결책을 제시하려 합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건강한 관계에 들어가는 일에 실패합니다. 윤철희 집사님이 입원한 병실을 방문했을 때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수술을 마친 날 인도 계통의 한 간호사가 필요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아직 회복되지 않았고, 여전히 고통스러워하는 환자와 걱정하는 가족들을 위해서 정말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간호사의 웃는 얼굴과 긍정적인 태도가 환자의 회복과 가족의 편안한 마음에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월요일 회복 병동으로 옮긴 윤집사님을 방문했습니다. 한 간호사가 필요한 약물을 주고 조치를 취하면서 여러 가지 사항을 전달했습니다. 그 자리에 같이 있던 신집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 간호사의 말에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네요.” 실은 저 역시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같은 일을 하고 같은 말을 합니다. 그런데 전혀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필요한 조치와 약물을 주고, 설명하고 돌아갔습니다. 환자는 그의 직업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현대사회가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대상화하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화합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효율적인 방석으로 사용되어주기를 바랍니다. 관계란 목적 이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관계는 그 자체가 축복입니다.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가장 온전해지고, 삼위 하나님의 관계를 닮아가며,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성취됩니다.

 

4. 주 안에서, 주를 섬기며

 

바울이 본문에서 언급하는 가족의 관계와 사회적 관계에 대한 대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당시의 사회가 공유하는 관계에 대한 상식이 아닌 하나님 안에서의 새로운 접근, 복음적인 관계로의 변화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서로에 대한 복종의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5:21)는 말씀이 모든 복음적 관계를 규정하는 기준입니다. 에베소서에서는 먼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골로새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핵심은 피차 복음 안에서의 복종입니다. 아내는 남편 복종하기를 주님께 하듯 해야 합니다. 남편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 십자가를 지는 사랑의 수고를 자원해야 합니다. 역시 복종입니다. 자녀들 또한 주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아야합니다.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의 섬김입니다. 종과 상전들에게도 같은 원칙이 적용됩니다. ‘주께 하듯’ ‘주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상전을 섬겨야 합니다. 특히 종들에게 당부하기를 골 3:24에서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고 했습니다. 쉽게 분노하고 적개심으로 귀족 사회를 대적하기 쉬운 종들에게 대한 온유함의 권면입니다. 상전들에게 의와 공평의 원칙을 가지고 종들을 대하라고 하는 것은 당시 로마 사회와는 맞지 않는 권면입니다. 로마의 시민 사회는 지금보다 더 뛰어난 철학과 법체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오직 귀족과 시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교양과 문화수준은 노예들의 처절한 노동생산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 질서가 무너지면 그들의 삶의 기분 또한 무너진다는 것을 아는 귀족들이 정의과 공평으로 노예들을 대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덧붙입니다.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4:1)

 

결국 교회는 주님 안에서 주님을 섬기는 관계입니다. 주님 안에 있기 때문에 서로를 섬길 때 결국 주님을 섬기는 것이고,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서로에 대한 복종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일치를 말씀하면서 교회와 성도가 복음 안에서 또 다른 일치를 이룰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17:20-23)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관계,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허락하신 관계이며 인류가 죄로 말미암아 상실한 관계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회복하신 관계입니다. 관계에 허락하신 은혜, 단절되고 분리된 현대사회 속에 교회가 누리고 증거해야 할 가장 아름다운 복음입니다. 이 복음으로 살고 보여주고 증거하는 초대교회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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