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 10. 교회, 사람에게 사람 | 이응도 | 2017-06-15 | |||
|
|||||
초대교회 수요예배 - 골로새서 2017. 3. 22. 10. 교회, 사람에게 사람(골 4:7-18) 최근에 아픈 성도들이 많아서 혼자 심방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운전을 해서 다니면서 많은 생각들을 합니다. 아프거나 고통당하는 성도들이 없기를 바라지만, 곧장 회복되기를 바라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땅에서의 삶이 그리 단순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 땅에 보냄을 받고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은 ‘있지 말아야 할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발생할 일’들이 때를 따라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결국 교회는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사람을 허락하셔서 함께 하나님을 만나고 서로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며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하기 위해 허락하신 것이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은 복음의 사람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사람들이 얼마나 중요하며 그들이 어떻게 함께 복음을 위해 협력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골로새 교회에 쓰는 편지의 마지막에 사도 바울이 전하고 있는 함께 동역하는 사람들에 대한 소식을 함께 나눠봅시다. 1. 함께 문안하는 사람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다양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문안합니다. 바울과 로마의 감옥에 함께 있으면서 함께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수고하고 애쓰는 사람들을 그들이 기억하고 본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1) 두기고는 아시아 지방 태생입니다.(행 20:4) 바울의 3차 여행 때 그를 수행했습니다. 바울의 신임을 받아서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를 각 교회에 전했습니다.(엡 6:21-22/골 4:8) 이후에 디도가 사역했던 그레데에 파송되었고(딛 3:12), 에베소에 파송되기도 했습니다.(딤후 4:12) 전승에 의하면 그는 후에 콜로폰(Colophon)의 주교가 되었으며 순교했습니다. 바울은 그에 대해 표현하기를 “사랑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군이요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골 4:7)고 말합니다. 그는 성도 간의 사정을 알게 하고 마음을 위로하는 사람(골 4:8)입니다. 그는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바울과 함께 하면서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여러 성경에서 소개될 때마다 바울의 기대와 기쁨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2) 오네시모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빌레몬서의 또 다른 주인공이며 골로새서의 주제를 삶으로 전달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빌레몬의 종이었고, 도망했다가 로마의 옥중에서 사도 바울을 만났습니다. 그는 두기고와 함께 빌레몬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가 손에 들고 갔던 편지가 빌레몬서입니다. 그는 이미 ‘신실하고 사랑받는 형제’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있는 곳에서 일어난 많은 일들을 그들이 알고 경험하게 할 중요한 증인입니다. 복음이란 오네시모이 삶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죄의 권세 아래에 있던 한 사람이 변화를 받아서 삶으로 복음의 말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아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 태생입니다. 에베소에서 소요가 일어났을 때 투옥되었고(행 19:29) 바울을 따라 예루살렘과 로마까지 동행했습니다.(행 20:4, 27:2) 에베소에서의 투옥이 본인이 원하지 않았던 억울한 사건이었다면 로마에서의 ‘갇힘’은 본인의 선택이었습니다. 그가 이미 억울한 수감생활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감옥에서의 삶을 선택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자발적이고 의지적인 동참’ - 이것이 성도가 본 받아야 할 십자가의 참 모습입니다. 십자가는 감사와 기쁨으로 자원하는 것입니다. 4)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이며, ‘마가 요한’의 다락방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베드로의 구술로 마가복음을 기록합니다.(행 12:12,25, 벧전 5:13) 그에게 있어서 아픈 기억은 1차 전도여행의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한 일이며 그 일로 인해서 2차 전도여행 때는 바울과 바나바가 그에 대한 의견 차이를 조절하지 못해서 각각 다른 곳으로 선교를 떠나게 된 일입니다. 그는 이후에 자신을 용납하지 않았던 바울과 함께 사역했고, 특히 로마의 옥중에서 함께 생활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과거의 아픔은 상처가 되고 질곡이 됩니다. 과거의 사람으로 삽니다. 어떤 사람에게 과거의 아픔은 성숙의 계기가 되고 성장의 자양분이 됩니다. 자신의 과거의 부끄러움과 아픔에 대해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사모하고 진정한 변화를 만들어낸 사람 - 우리는 마가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5) 유스도라 불리는 예수는 신약 성경에서 오직 본문에만 나타납니다. 그는 아마도 골로새교회와 인연이 있었던 것 같고, ‘할례당’이라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서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사람에 속한다고 전합니다.(골 4:11) 할례당이면서 바울의 고난에 동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때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참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차이들을 만납니다. 아무리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해도 포기되지 않는 생각들이나 관점들이 있습니다. 유스도가 할례당, 즉 율법주의적인 관점을 포기하지 못하는 성도였지만 바울의 감옥에 동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전하신 복음에는 충분히 동의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해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어려서부터 자라고 배우고 젖어 있는 율법주의를 완전히 벗어나기에는 큰 고통이 따릅니다. 그래서 그는 할례당이지만 또 바울과 함께 있습니다. 어쩌면 율법주의와 복음 사이에 놓인 먼 거리만큼 그의 고민은 깊고, 그가 넘어야 할 장벽은 높습니다. 하지만 그가 손에 돌을 들지 않고 바울과 함께 받는 고난을 선택한 것은 바울에게 오히려 큰 위로가 되고 있습니다. 6) 바울과 로마의 감옥에 스스로 찾아가서 동거한 몇 사람 중에 ‘에바브라’가 있습니다. 그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골로새 교회를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빌립보 교회에서 사역했던 에바브로디도를 혼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가 바울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성경은 자세히 언급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에 에베소에서 약 3년간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소아시아 지역에 속해 있는 골로새 사람들도 바울의 복음을 들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학자들은 그 골로새 사람들 중에 에바브라가 있었고, 그가 복음을 듣고 변화를 받아서 자신의 고향인 골로새에 교회를 세운 것으로 봅니다. 그에 대한 소개는 본문과 함께 골 1:7-8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골 1:7-8) 그는 좋은 교사였고, 신실한 일꾼이었고, 교회와 바울 사이에서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는 기억하며 ‘신실함’ ‘성령’이라는 말을 기억하고, 4장 12-13에서 ’기도와 수고‘라는 단어를 기억합니다. 어떤 사람을 생각할 때 함께 떠오르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에 대한 기억에서 부정적인 말을 떠올리지 못합니다. 그는 참 선하고 성실한 사람입니다. 또한 그는 ’자발적 고난‘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빌레몬서 1:23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라는 표현이있습니다. ’함께 갇힌 자‘라는 표현은 의지적이고 능동적인 선택을 말하고 있습니다. 에바브라의 고난은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십자가였습니다. 그는 바울과 함께 그 고난을 당하기로 작정하고 동참했습니다. 7) 의사였던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기록자입니다.(눅 1:3, 행 1:1) 바울의 2차 선교 여행 때부터 동행했던 것으로 추축됩니다.(행 16:10-17, 20:6-16) 안디옥 출신이며, 헬라인이며, 의사였습니다. 그는 바울의 주치의로 선교에 동참하면서 지중해에서 배가 파손될 때에 바울을 도왔으며, 로마의 감옥에까지 그와 동행합니다. 바울은 특별히 그에 대해 표현하기를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골 4:14)라고 말합니다. 8) 데마는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한 때 바울이 있던 감옥에서 동거했습니다.(몬 1:24) 그는 바울이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고행 데살로니가로 돌아갑니다.(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해서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고/딤후 4:10) 순교를 앞둔 바울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기고 맙니다. 십자가 앞에서 제자들로부터 버림을 당했던 예수님의 마음을 바울에게 경험하게 했던 사람입니다. 9) 아킵보는 감옥에 함께 있는 사람이 아니라 골로새 교회의 목회자였습니다. 빌레몬의 아들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몬 1:1-2) 골로새 교회를 세웠던 에바브라가 바울과 함께 로마의 감옥에 있을 때 아킵보는 그를 대신해서 목회를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그에게 큰 애정과 관심을 표현합니다. 빌레몬서에서도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몬 1:2)라고 언급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골 4:17)고 권면합니다. 힘들고 어렵게 목회를 하는 그를 권면하여 좋은 목회자로 세우기를 원하는 바울의 마음이 잘 표현되었습니다. 2. 사람에게 사람 바울이 언급한 교회의 일군들 중에 몇 사람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먼저 율법주의자이면서 복음을 받은 유스도와 바울의 주치의인 누가를 생각해 봅시다. 누가는 헬라인입니다. 그가 할례를 받은 흔적이 없습니다. 당시 율법주의자들은 믿음을 받아들였지만 또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로마의 감옥에서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고 동역합니다. 서로 적대할 수 있지만 복음은 그들을 하나가 되게 합니다. 오네시모와 아킵보는 어떻습니까? 한 사람은 도망친 노예요, 한 사람은 어려서부터 그를 노예로 만나고 대했던 주인의 아들입니다. 그들이 지금 한 교회에 대해 말하고 있고, 서로 복음의 동역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노예였던 오네시모는 이미 ‘신실하고 사랑받는 형제’가 되었고, 로마의 감옥에서 성장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교회에 대해 그들에게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받은 직분을 감당하는 일로 고민하는 아킵보에게 오네시모는 살아있는 복음입니다. 에바브라와 마가는 서로에게 좋은 교사가 되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초대교회의 ‘금수저’로 예수님을 보고 듣고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던 마가는 심성이 연약했던 사람입니다. 복음의 많은 증거를 삶으로 경험했지만 1차 전도 여행의 혹독함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믿음이 없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연약했을 뿐입니다. 그에게 에바브라는 큰 도전입니다. 성경은 그가 어떻게 복음을 듣고 교회를 세웠는지의 과정을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성장의 과정을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교회를 세웠습니다. 작은 증거로 큰 열매를 맺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마가는 좋은 교사입니다. 마가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의 기억에서 자신에게 찾아온 믿음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두기고와 아리스다고는 ‘자발적 고난’의 좋은 본이 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바울과 함께 고난을 당한 경험을 통해서 더 견고한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거듭되는 삶의 고난 가운데서도 받은 사명과 사랑을 잊지 않는 참 좋은 일군들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잊지 않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데마입니다. AD 62-63년 경, 골로새서를 기록할 때까지는 바울과 함께 하는 좋은 일군이었습니다. 그 이후 잠시 바울이 감옥에서 놓였다가 다시 투옥됩니다. AD 66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가슴 아픈 이야기를 합니다. 데마는 거듭되는 고난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신실했던 한 때를 기록으로 남깁니다. 누구나 이런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고 성실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보다 강하고 우리의 인내보다 오래 참습니다. 실족하게 하고 포기하도록 만듭니다. 그는 한 때 선교의 대열에서 벗어나고 선교팀을 연약하게 만들었던 마가를 통해서 교훈을 얻었어야 합니다. 3. 함께 교회가 되어가다. 교회는 이렇게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바울에게 이 사람들이 중요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중요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귀한 일군들입니다. 2000년 전, 로마의 감옥에 세워진 교회에서 그랬고, 골로새 교회에서 그랬고, 오늘 우리들의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서로에게 참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 있기를 바라고, 서로를 세우는 좋은 동역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사람에게 사람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