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강자 - 2. 영적 근성 | 이응도 | 2017-06-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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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 예배 영적인 강자로 살다. 2017. 4. 5. 2. 영적 근성(히 12장 1-3절) 몇 년 전 친구 목사가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함께 헌신하겠다는 몇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를 방문했을 때 수산물 사업을 한다는 한 집사님이 몇 일 동안 담임 목사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정말 친절하게 대해주셨습니다. 주변 지역을 관광하기도 했고, 좋은 식당에도 갔었습니다. 무엇보다 고마웠던 것은 어려운 환경에서 목회를 시작하는 친구 목사의 좋은 동역자가 되겠노라고 거듭 결심을 다짐하는 것이었습니다. 친구의 가정에 대해 자세하게 배려해주는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제가 필라로 돌아오고 난 다음에도 가끔 연락을 해서 친구 목사의 가정에 대한 문제를 의논하기도 했습니다. 얼마 전에 다시 그 교회를 방문했을 때, 그 집사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그 교회를 방문한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교회를 떠나셨다고 했습니다. 그 교회가 다른 교회와 합병을 하고 새 일꾼을 세우는 과정에서 섭섭함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반대에 반대를 거듭하다가 다른 성도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자 다소 물의를 일으키고 교회를 떠났다고 했습니다. 씁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신앙으로 산다는 일은 쉽지 않은 과정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흔드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고, 그 중에 많은 것들은 신앙의 영역 안에 있습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협하는 요소가 비신앙적인 상황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의 영역 안에서 찾아온다는 말입니다. 교회나 직분, 예배나 헌신에서의 작은 차이가 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하게 하고, 신앙의 뿌리를 흔드는 일은 다반사입니다. 신앙생활의 영역 밖에서 찾아오는 시련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강력하게 대응하지만 신앙생활의 영역 안에서 찾아오는 시련에 대해서는 많이 분노하고 상처받습니다. 결국 신앙생활의 건강성을 잃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의 첫 세대들은 오늘날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어려움을 담담하게 견디면서 초기 교회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그들의 눈물과 땀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고, 그 결과가 오늘날 교회에 미친 영향을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처음부터 그랬을까? 하지만 모든 초대교회 성도들이 담담하게 고난을 견딘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흔들리고 도피하고 포기했을 것입니다. 본문의 권면은 인내하는 성도들에 대한 격려이면서 용기를 잃고 포기하려는 성도들에 대한 복음적 권면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쓸 때 언급한 데마가 있습니다. 그는 젊은 사역자로 사도 바울의 감옥에 자원하려 찾아와서 동역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 후 기록된 디모데후서 4:10에 보면 사도 바울은 그를 평가하기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라고 했습니다. 그의 믿음의 경주는 그것으로 끝나버렸습니다. 그런 성도들을 보면서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거나 혹은 교회적 관계를 떠나는 사람들은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을까요? 처음부터 그럴만한 사람이었을까요? 교회나 신앙을 떠나는 DNA가 있어서 중도에 신앙의 여정과 경주를 포기하게 되는 것일까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아브라함도 좋은 않은 때가 있었고, 모세도 시험 중에 있는 때가 있었습니다. 다윗 또한 범죄하고 은닉하는 때가 있었고, 베드로도 연약하여 부인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기 안에 있는 두 주인을 고통 중에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성령의 임재를 강력하게 경험했지만 유대주의와 복음으로 늘 갈등했고, 다른 여러 초대교회 또한 인간적인 문제와 신학적인 차이로 갈등했습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헬라파 과부와 유대파 과부들은 교회로부터 구제받는 일로 다퉜고, 이 일은 교회의 리더십을 새롭게 구성하는 결과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떤 사람의 연약함을 ‘처음부터 그럴 사람’으로 규정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복음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고, 배반하고 포기할만한 사람이었다면 그에게 복음은 왜 필요한 것입니까? 엄청난 시련과 고난 앞에 연약해지지 않는 사람이 없고, 교묘한 시험과 유혹 앞에 비겁해지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문제는 그가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허락된 복음으로 그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고 훈련하며 삶을 이끌어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연약한 것은 거의 본성과 같습니다. 복음으로 훈련하여 영적인 근육과 근성을 키워가야 합니다. 2. 두 가지 원칙 복음으로 훈련하여 영적인 근성을 키우는 일에 대해 본문 1절은 아주 단순한 두 가지 원칙을 제시합니다. 첫 번째는 ‘벗어 버리고’이며, 두 번째는 ‘인내로써’입니다. 아마도 히브리서의 기자는 당시 로마의 곳곳에 세워진 경기장에 가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철학과 종교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로마는 군사와 체력 또한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다양한 경기를 열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역시 달리기입니다. 선수들이 긴장한 얼굴로 출발선에 서면 심판은 “선수들, 준비!”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당시 고대 로마에서는 그것은 입고 있는 옷을 벗으라는 신호였습니다. 그들은 마찰 없이 가장 효율적으로 뛰기 위해 발가벗고 달렸습니다. 1절에서 말하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중인’이라는 표현과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라는 표현은 당시 경기를 관람한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풍경입니다. 그들이 익히 보고 알고 있는 것처럼 선수들은 잘 달리기 위해서 몸을 무겁게 하는 것들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믿음의 경주에 임하는 성도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성도가 너무 많은 것을 껴입고 있을 때, 스스로 벗어버리지 못할 때... 적극적으로 개입하셔서 불필요한 것들을 정리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때로 마음에서, 관계에서, 사회적 지위에서, 그리고 물질에서 그러합니다. 무겁고 얽매이기 쉬운 것, 우리를 무겁게 하고 주저하게 하는 것, 결국 포기하고 주저앉게 되는 다양한 이유가 되는 것 - 우리에게는 없습니까? 두 번째 ‘인내로서 경주하는 일’에 대해서는 우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로마 시대에서 시작해서 오늘날까지 올림픽의 꽃으로 불리는 종목이 있습니다. 바로 마라톤입니다. 인간의 극한의 한계를 시험하는 종목입니다. 달릴 수 있는 체력이 필요하고, 끊임없는 일어나는 그만두고 싶은 욕구를 이길 수 있는 강력한 의지가 필요하고, 온 몸에 전해지는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식물을 물 위에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 전도서의 이 말씀은 당시 익히 알려진 애굽의 속담에 근거한 것입니다. 나일강을 중심으로 발달한 애굽은 우기에 크게 범람하는 나일강의 특성을 따라 특이한 농경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강이 어떻게 범람을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강물에 씨를 뿌려두는 것입니다. 우기가 그치면 형성된 뭍의 곳곳에서 곡식이 자라게 됩니다. 비록 내가 뿌린 씨앗의 열매를 내 곡간에 채우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강물에 나의 헌신을 뿌리고 그 열매를 공동체가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헌신을 계속 하는 일, 결과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일을 지속적으로 섬기는 일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3. 바라보고 생각하라!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는 표현은 로마의 경주에 참여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차 경주 장면이 압권이던 벤허라는 영화를 아시지요? 경주를 주관하는 가장 권위있는 사람이 경기장의 높은 곳에서 위엄을 갖추어 앉습니다. 모든 경주자들은 그를 바라봅니다. 그의 눈에 드는 일, 그를 만족하게 하는 일, 그를 영광스럽게 하는 일이 모든 경주자의 목표이자 의무입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는 성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예수는 ‘보좌에 앉으신 죽임당한 어린 양’입니다. 2절에서 이 말을 풀어서 설명하기를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下) 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모든 무거운 것을 벗어버리고 인내하면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믿음의 경주를 계속해야 합니다. 성도가 경주하는 구체적인 삶의 모습은 그리 아름답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영광보다 못할 수 있고, 불신자의 삶의 즐거움보다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예수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기쁨을 위해 십자가의 고난과 수치를 인내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좌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셨으나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길을 믿음으로 걷는다고 해도 때로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만나게 됩니다. 고난의 종류와 이유와 길이가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몸이 피곤해지고 마음이 상실감에 빠집니다. 이때를 생각해서 히브리서의 기자는 하나 더 권면합니다. 고개를 들어 예수를 바라보는 일과 함께 고개를 숙여 예수를 생각하는 일을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표현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을 베풀었지만 거절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거절과 고통을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이웃들에게 증거될 은혜를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당한 모든 고통보다 주님이 베푸신 은혜가 비교할 수 없이 큽니다. 4. 영적인 근성과 믿음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장이라고 부릅니다. 믿음으로 살았던 수많은 복음의 선조들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히 11:33-37)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환란도 없고 시련도 없는, 연약함도 없고 유혹도 없는 깨끗한 삶을 살아서가 아니라 그 모든 시련 속에서 오직 믿음으로 자신에게 허락된 소명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들의 믿음의 조상이 되며,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12:1)이 됩니다. 그들이 삶으로 복음의 능력과 진리됨을 증거하고 있고, 또한 삶으로 우리들을 권면합니다. 시련과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근성있는 성도가 되라고 말합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일은 쉽지만 신앙으로 살기는 어렵고 결단하기를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마음과 생각으로 계획한 일을 온 몸에 전달하고 지킬 수 있는 영적인 근육들과 어떤 시련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영적인 근성을 키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백한 대로 살고, 결단한 대로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꽃은 비바람에 흔들리며 봉오리를 틔웁니다. 하지만 뿌리가 뽑히면 시들고 맙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세상에 맞설 수 있는 근성있는 성도, 초대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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