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강자 - 4. 큰 그림, 더 나은 사람 | 이응도 | 2017-06-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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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 예배 영적인 강자로 살다. 2017. 5. 3. 4. 큰 그림, 더 나은 사람(빌 3:12-14) “내가 누군지 알고 싶으면, 내가 어디 살고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머리를 어떻게 빗는지 묻지 말라. 다만 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위해 사는지, 내가 사는 목적에 충실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물으라. 이 두 대답으로 모든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 더 나은 대답을 갖고 있는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이다.”(영적 성장의 길, 두란노 p. 69 재인용) 미국 대륙을 횡단하면서 감탄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정말 넓고 크고 다양한 땅입니다. 한 나라에서 여행을 하면서 동시에 4계절을 경험할 수 있기도 합니다. 다양한 인종들이 각자 다른 환경을 만들어서 살고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합니다. 그리고 제가 큰 호기심과 놀라움으로 다가온 것 중 하나는 끝없이 이어져 있는 철도였습니다. 도대체 대륙의 동서를 잇는 철도를 건설하겠다는 생각을 한 사람, 계획한 사람, 설계를 하고 실행한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까....? 넓은 평원을 끝없이 달리는 수백 량의 기차들을 보면서 감탄했었습니다. 최근에 스티븐 앰브로스가 쓴 ‘대륙횡단철도’라는 책에 있는 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대륙을 연결하는 철도 사업, 당연히 단일 사업으로는 유래 없이 많은 비용과 인력이 들었습니다. 작가는 ‘콜리스 헌팅턴’이라는 한 투자자를 주목합니다. 대륙을 횡단하는 철도 건설을 시작할 무렵, 많은 사람들이 기공식에 초대를 받습니다. 대륙의 서쪽 끝에서 출발하는 첫 번째 레일이 놓는 곳에 천막을 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소위 기공식이라는 이름으로 대단한 행사가 열렸습니다. 당시 서부지역에서 가장 큰 투자자였던 콜리스 헌팅턴도 당연히 초대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초대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첫 번째 못이 박는 것을 기념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라. 하지만 나는 그럴 마음이 없다. 저기 보이는 흉칙한 산들을 보라. 저기 황량하고 거친 들판을 보라. 우리는 이 일에 실패할 수도 있다.... 첫 번째 못은 누구나 박을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박고 있는 이 첫 번째 못과 이 일을 마치면서 박아야 할 마지막 못 사이에는 가늠할 수도 없는 많은 노동과 셀 수 없이 깔아야 할 많은 침목들, 넘어야 할 산과 건너야 할 강, 달리고 또 달려야 할 광야가 있다. 나는 첫 번째 못이 아닌 마지막 못이 박힐 때까지 기뻐하지 않겠다.” 그는 마지막에 놓일 침목과 박힐 못에 관심이 있었고 대륙을 가로지르는 레일에 박힐 수 많은 못들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레일까지 튼튼하게 놓이지 않는다면 처음 박힌 못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1869년 5월, 동과 서에서 출발한 철도가 마침내 완성되고 마지막 금으로 만든 못이 박힐 때 비로소 그는 축하할 수 있었습니다.
1. 큰 그림, 혹은 새로운 그림 저는 어려서부터 목사가 되겠다는 말을 하면서 자랐습니다. 목회자의 가정이기도 했고, 그렇게 말을 하면 어른들이 좋아하셨기 때문입니다. 꽤 훌륭한 목사가 되겠노라고 포부를 밝히면 두둑한 용돈이 주어지기도 했습니다. 어릴 적 그렸던 저의 인생에 대한 그림은 그저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모습이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고통스러운 성장의 과정을 거친 다음 저는 비로소 저의 목회자로서의 소명에 대한 좀 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이 아닌, 내가 하나님 앞에서 허락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헌신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기도의 열매였습니다. 나면서부터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바리새인이요, 헬라 철학자로 성장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의 그림은 나면서부터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그 그림을 따라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가 인생에서 만난 최초의 장벽은 스데반이라는, 자신의 그림을 부정하는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장벽을 돌로 쳐서 없애고 또 다른 장벽들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도상(途上)에서 새로운 그림을 만납니다. 그 그림이 그의 인생을 통째로 바꿔버렸습니다. 그가 아그립바 왕 앞에 서서 자신의 인생의 그림이 바뀐 과정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그날, 그는 자신의 인생에 새그림을 그려준 예수를 만났다고 증언합니다.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 아그립바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 먼저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행 26:15-20) 2. ‘세상이 그린 그림’ vs. ‘하늘이 그린 그림’ 바울은 사도행전 26장에서 매우 중요한 진술을 합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살아야 할 남은 삶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보여주신 그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늘에서 보이신 것’, 즉 자신의 인생에 대한 새로운 그림을 거역하지 않고 그 뜻을 따라 ‘증인의 삶’을 살기로 결단하고 순종했습니다. 바울 한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조상들이 택했던 삶의 방식이 있었습니다. 그 또한 아버지 데라에게서 배운 대로 자녀들에게 가르치면서 그렇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십니다. 새로운 땅, 새로운 민족, 새로운 믿음을 말씀하십니다. 이후 아브라함의 삶은 하나님이 그에게 허락한 그림대로 사는 삶이었습니다. 모세 또한 그렇습니다. 다윗이 그렇습니다. 기드온이 그랬고, 호세아와 아모스가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초대교회의 일꾼들이 그랬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모두 세상이 그들에게 그려준 그림이 아닌 하늘의 하나님이 그들에게 허락하신 그림대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 그림이 그들의 삶에서 이루어집니다. 3. 흔들리는 세상, 요동치는 인생(엡 4:13-14)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와 성도들의 삶의 모습과 그들의 현실에 많은 차이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가 이해하는 세상은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고 있습니다. 성도도, 교회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장하지 않으면 세상과 함께 흔들립니다. 그래서 바울은 13절에서 성장을 말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성도와 교회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합니다.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비로소 흔들리는 세상을 따라 함께 요동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성도가 아닌 장성한 성도, 굳건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지난 한 달을 돌아볼까요? 여러분을 가장 기쁘게 한 일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을 가장 분노하게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한 말은 무엇입니까? 교회당에 와서 예배하는 중에도 계속 머리를 떠나지 않던 말들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여가의 시간을 가장 많이 사용한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보이는 모든 것과 들리는 모든 것, 그리고 마음에 유혹되는 모든 것을 따라 살아갑니다. 세상이 나의 정서와 만족을 결정하도록 나를 허락합니다. 내 마음과 삶의 주인이 나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이 되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어느새 흔들리는 세상이 나의 마음과 가치를 지배합니다. 심지어 우리는 흔들리는 세상 위에 우리의 신앙을 놓아두기도 합니다. 흔들리는 세상을 따라 기도가 흔들리고 관계가 흔들리고 신앙이 흔들립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인격과 성품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성숙하지 못할 때 우리는 늘 풍랑이는 바다 가운데서 두려워하며 소리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4. “여전히 좇아가노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2-14) 사도 바울이 사용하는 단어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그는 아직도 자신이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사도로 그 뜻을 이루는 과정 가운데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는 여전히 좇아가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두 번째 그는 뒤에 일은 잊습니다. 오직 앞을 바라봅니다. 만일 그가 자신이 아직 복음을 깨닫지 못했을 때 행했던 모든 일을 다 마음에 두고 있다면 죄책감과 수치심을 극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그가 자신에게 악한 말을 하고 핍박했던 사람들을 다 기억한다면, 그들의 말과 표정과 행동들을 다 마음에 두고 있다면 잠을 이룰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그런 과거의 일에 마음과 삶의 에너지를 낭비하기에는 해야 할 일이 너무 중요하고 많습니다. 그는 오직 앞에 있는 것,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생명들과 복음에 헌신합니다. 셋째 그에게는 푯대가 있습니다. 그것은 위에서부터 부르신 부름입니다. 그 부름에는 상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 부르심의 상을 바라보며 오늘도 헌신합니다. ‘하늘의 부르심’은 그에게 허락된 큰 그림이요, 그 그림이 그려지는 것을 막고 훼방하는 것은 사탄의 일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기를 원했습니다. 사탄의 훼방을 허용하지 않기로 결단합니다. 과거의 기억과 상처가 자신의 삶을 흔들지 못하도록 다시 앞을 바라봅니다. 저기 앞에 푯대가 보입니다. 아직 그 푯대에 닿지 못했고 얻지 못했지만 오늘도 한 발걸음을 옮깁니다. 허락하시는 날까지 한걸음씩 그렇게 걸어갈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더 나은 삶을 소망합니다. 더 나은 가치가 내 삶에서 실현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소원이 만들어내는 삶의 그림은 그리 아름답지 못합니다. 오늘 성경은 이 땅에서 사람의 소원이 만드는 그림이 아닌 보다 크고 아름다운 그림을 소개합니다. 바울에게 허락하셨고, 신앙의 여러 선조들에게 허락하셨고, 초대교회에 허락하셨고, 오늘 우리들에게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만드신 그림, 그 그림에 헌신하는 삶이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습니다. 큰 그림과 더 나은 삶을 이룰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싶으면, 내가 어디 살고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머리를 어떻게 빗는지 묻지 말라. 다만 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위해 사는지, 내가 사는 목적에 충실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물으라. 이 두 대답으로 모든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 더 나은 대답을 갖고 있는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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